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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 탄신일에 즈음하여......종교는 필요악인가

헬로우 럭키 찬! 2021. 5. 1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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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인터넷 매장을 기웃거리다 꽤 신박한 글을 발견하였다.

편집팀이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와 주고받은 일문일답.

 

이 정도의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종교학자라면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현대 무신론의 수호자 ‘네 기사’들과 과학, 종교에 관한 지적 담론도 가능할 것 같다.

2012년 5월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강연하는 오강남 교수. 예수가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했다는 결정적 증거로, 나아가 극단적으로는 예수교는 불교에 깊이 영향을 받은 한 종파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요한 근거로 불교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도마복음’에 대한 토론회.   ※ 1945년 이집트 낙 하마디에서 발견된 도마의 기록서를 주제로...

 

그는 필 주커먼의 종교 없는 삶’의 추천글을 통해서도 자신의 심중을 피력하기도 했는데.....

‘종교 없이 산다고 허무하게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오히려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실증적 자료를 통해 명확히 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종교가 없어도, 신이 없어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없어야, 신이 없어야‘ 잘 산다는 것이다. 숨 막힐 정도인 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나면 삶과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지금껏 당연히 여기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고, 봄에 솟아나는 들풀 한 포기, 바람에 나부끼는 잎새 하나를 보고도 경이로움과 놀람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일상의 일에서부터 광대한 우주의 ’경이로운 신비‘를 하나하나 발견하며 경외감과 환희와 황홀함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야말로 ’아하‘의 연속이다. 이렇게 종교를 넘어서 모든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사는 삶의 태도를 저자는 ’경외주의‘라고, 그리고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을 ’경외주의자‘라 부른다. 이것이 오늘날 절실한 ’종교 아닌 종교‘인 셈이다. 아인슈타인이 가지고 있던 기본 태도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인류 문명이 사라지지 않고 발전하려면 서로 간의 공감대를 확장하고 원심력을 높이듯 공감의 반경을 넓혀야 한다"고 역설했던 과학철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장대익 교수도 빼놓을 수 없는 일.

나의 소장서 ‘다윈의 식탁’과 ‘다윈의 서재’ 저자이다.

 

특이한 것은 본래 개신교 모태신앙이었으나 무신론자로 전향했다는 것.

진화생물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무신론자로 전향하게 되었는데, 석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앙은 유지하고 있었다(유신론적 진화론자). 완전히 무신론자가 된 시점은 박사 과정 중의 일이라고 한다.

2020년 9월 22일자 UPI뉴스에 실린 오강남 교수의 기사.

한국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의미로 본 기독교를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일부는 내게도 초문의 정보다.

 

"어느 학자의 말대로 21세기 기독교인들은 '질문하는 교인'이어야 한다는데, 아직도 한국 교회의 19세기적 근본주의 신앙은 개인의 독립적 사고를 말살시키므로 교인들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세뇌되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여러 가지 음모론을 교인들은 그대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 명예교수가 21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올린 글이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반향과 함께 주목을 끌고 있다.

 

일부 교회와 신도들이 현 정부의 방역 정책에 반하는 다양한 음모론을 생산하고 있는 현상과 관련, 오 교수는 "지금 한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종을 거역하는 것을 하나님 자신을 거역하는 것으로 믿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개신교가 타 종교에 비해 보수 정치세력과 잘 결합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초기 한국 개신교의 본거지는 평양이었다. 이북이 공산화가 되면서 평안도 개신교인들이 대거 남쪽으로 피란을 왔다. 서울에서 이들의 집결 장소는 평안도 출신 한경직 목사가 이끄는 영락교회였다"며 "이들은 지주들과 기독교인들과 친일반민족 세력들을 박해한 이북 공산 치하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을 통해 철저한 반공 투사들이 되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고 이들은 공산당 박멸에 앞장섰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제주도에 가서 기타 우익 단체들과 합동으로 이른바 4.3 사건에서 공산주의자 뿐 아니라 양민들까지 살해하는 일을 저질렀다. 제주 사건 이후 서북청년단 단원 상당수가 경찰, 군, 육사, 목회자 양성소 등에 들어가 남한 보수 정권의 중요 버팀목이 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한국 개신교는 반공에 투철한 집단이 되고 반공을 내세운 보수 정치세력과 결합하여 왔다"고 분석했다.

 

이어 "일제 강점기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던 상당수 한국 개신교는 해방 후 남한에 세워진 친일 정권들과의 야합으로 꾸준히 기득권을 확대해 온 부끄러운 역사가 있다"며 "이런 배경 때문에 이북과의 평화 협력을 강조하거나 일본과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려는 현 정권을 두고 나라를 공산화하려 한다, 나라를 이북에 갖다 바치려고 한다, 일본과 대결하면서 나라를 망치려 한다. 대통령이 간첩이다 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 교수는 코로나19가 종교 행사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진단했다.

 

그는 "앞으로 기독교의 경우 예수님의 말씀처럼 특정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리라 생각한다. 감염병 위험이 있는 지금이야말로 다 함께 모여 큰소리로 외치는 것보다 예수님의 말대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진정으로 이르렀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본다. 불교도 지금처럼 일요일 정기 법회 대신 예전처럼 필요할 때 절을 찾고, 혼자 조용히 예불하거나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자각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진단했다.

 

교회 헌금 문제에 대해선 "현재 헌금은 내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나 교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과시용으로 바쳐지는 것이 보통이고, 이렇게 하여 모여진 헌금은 하느님께 바쳐진 것이라고 하면서 하느님과 한마디 의논하지 않고 하느님보다는 교회와 교역자를 위해 쓰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라고 비판했다.

 

오 교수는 개신교의 경우 천주교,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비해 목회자들의 기행·망언 등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짚었다.

 

"타 종교에 비해 개신교의 중앙집권적 체제가 아니기 때문인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목사님들이 훌륭한 신학교에서 정규 교육과 신학적 소양을 가지고 목회에 임하는 이들도 많지만 상당수는 천주교 신부나 불교 승려에 비해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도 교역자들이 되는 경우가 많다"며 "심지어는 무허가 신학교 졸업장이나 가짜 학위를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도 있고 처음부터 자질이 의심스러운 이들이 신학교에 들어서는 것도 사실인데 이런 미자격 목회자들이 기행이나 망언의 주인공들인 경우가 많다"고 진단했다.

 

오강남 교수는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뒤 캐나다 맥마스터 대학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쳤다.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둘러보기' '도덕경' '예언자' 등 다수의 저술과 역저가 있다.

 

 

자, 그럼 알라딘의 인터뷰이로서 종교에 대한 오강남 교수의 생각을 조금 더 들어보자.

 

인터뷰어: 알라딘 편집팀 박지영

올해 가장 센세이셔널한 기독교책을 낸 오강남 교수 인터뷰를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기획했다. 이메일로 제대로 된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되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진지해서 멋졌다. 그가 낸 책들이 '쉽게 쓰여진 것'이 아님을 절감할 수 있을 정도로. 지면 관계상 다 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아쉬웠다. 담을 수 없는 원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힐끗거리게 만드는 힘이 그의 글에 녹아 있었다.

 

 

■ 나의 종교, 나의 종교학

알라딘 : 먼저 비교종교학에 대해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교수님께는 어떤 의미가 있는 학문인지요.

오강남 : 비교종교학은 세계의 여러 가지 종교 현상들을 관찰하고 연구 분석해서 세계의 종교들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 이런 종교들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 종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본 구조가 무엇인지, 여러 종교들은 어느 면에서 비슷하고 어느 면에서 서로 다른지, 종교가 인간의 윤리적인 삶, 철학적인 사유, 사회 구조, 경제 활동, 심리 상태 등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등등을 살펴보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교종교학자들이라고 모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학의 기본 요건 중 하나는 어느 한 종교의 절대적 진리성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학의 학문적 성과에 힘입어 현재 많은 신학자들이 다른 종교들을 많이 알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적 태도를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 종교학은 무엇보다도 종교를 폭넓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알라딘 : 기독교를 지적으로 믿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강남 : 저는 어려서 어머님과 함께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제가 다니는 교회가 주는 설명을 덮어놓고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곤란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쯤부터 그 당시 많이 읽히던 「사상계」나 「기독교 사상」 같은 잡지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을 여러 가지 각도로 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쯤 류동식 교수님이 번역한 독일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의 <신약성서와 신화>인가 하는 노랑 뚜껑의 조그만 책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신학적인 문제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금년 6월 한국에 갔을 때 우연히 류동식 교수님을 뵙게 되어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대학에 가서 물리학을 전공하려던 생각을 접고 종교학과로 진학했지요. 한국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공부를 하고 캐나다에 와서 동양 종교 사상을 공부하면서 기독교를 세계종교사적 시각에서 보기 시작하고, 그렇게 할 때 기독교의 의미가 제 나름대로 뚜렷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출간 후 20년...

알라딘 : 교수님께서는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을 30대의 열정적인 종교학자가 풀어낸 반성적 성찰이라고 표현하셨었는데, 50대의 종교학자가 되신 지금에 와서 그 책을 보셔도 그 성찰이 여전히 자신 안에 있다고 느껴지시나요?

오강남 : 종교에 대한 기본 입장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분명 그 때가 더 '열정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때는 글 스타일이 지금보다 더 저돌적이고 도발적이었던 데 비해 지금은 좀 부드러워지고 순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연륜에 따른 변화라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쓰는 글을 보고도 아직 '도발적'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알라딘 : <예수는 없다>는 사실 제목 때문에도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가제는 <그런 예수는 없다> 였다던데...

오강남: 여러 가지 제목을 놓고 생각하다가 출판사에서 <예수는 없다>라는 제목을 제안했습니다. 제가 그 앞에 '그런'을 넣자고 하자, 편집을 맡은 분이 '그런'을 넣으면 '김이 빠져버린다'고 해서 제목에 '그런'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책 뚜껑을 열면 영어로라는 영어 제목이 들어가고, 다음 쪽에도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글로 "예수는 없다"라는 것이 사실은 "그런 예수는 없다"라는 뜻으로 쓰인 것임을 밝히는 제목 해설까지 붙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목 때문에도 주목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제목을 허용한 것이 '상업주의'적 관심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구태여 돈 때문이기보다는 더욱 많은 독자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수익금은 저 자신의 개인적 유익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알라딘 : <예수는 없다>에 대한 독자 피드백이 엄청났다고 들었습니다.

오강남 : 저에게 직접 이메일이나 편지를 보내신 분들이 한 5백명 정도 되고 그 외에 인터넷 서점 독자 서평란이나 신문 잡지의 서평 등이 있었지요. 알라딘에도 40개 이상이 올라와 있지요. 제게 개인적으로 보내온 독자들의 이메일 대부분은 고맙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시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같은 데서 자기들의 속내를 그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어 혼자 고민했는데, 자기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정직하고 당당한 종교인이 될 수 있는 길이 트임을 느낀다는 거지요. 어느 독자는 이런 해방감 때문에 전철에 서서 책을 읽으며 자기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어느 독자는 그 책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물론 목사님들 중 더러는 저보고 지옥에 갈 것이라느니 하는 저주 섞인 말을 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어보고 이야기하자고 하면 그런 책을 읽을 필요가 뭐냐고 합니다. 물론 목사님들 중에도 교인들에게 제 책을 '필독서'로 권하거나 직접 주문해서 교직들에게 돌리거나 교인들에게 사도록 했다는 분, 교회에서 몇 주간에 걸쳐 토론회를 가졌다는 분도 계십니다.

 

알라딘 : 혹시, 라는 원제를 가진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읽어보셨는지요?

오강남 : 저는 그 원본을 보았습니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 재미있습니다. 외부 압력에 의해 결국 절판조치가 내려지고 말았다고 하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낍니다. 제가 그 책에 나오는 내용에 동의하느냐 안 하느냐와 상관없이 무슨 책이든 강압에 의해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요즘 같은 개명 세상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비판

알라딘 : 교수님의 비판자 중에는 서구의 유행이론을 한국에 충격적인 양 소개한다는 식의 비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강남 : 제 주장이 지나치게 서구적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지만, 사실 저는 '유럽과 미국 중심주의'(Euro-American Centrism)를 혐오하는 입장입니다. 서양의 문화가 우월하다거나 서양 종교가 절대적이라는 등 서양을 중심으로 세계와 역사를 보는 태도는 배격합니다. 그러나 지동설 이론이나 상대성 이론이 서양에서 생겼다고 해서 그것을 배격해야 한다는 태도는 있을 수 없겠지요. 종교학이나 인류학, 심리학 등이 서양에서 생겼다고 그 이론들을 무조건 배격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알라딘 : 교수님이 캐나다에 거주하는 것이 교수님의 주장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시나요?

오강남 : 제가 캐나다에 거주한다는 것, 그리고 신학교가 아니라 일반 대학에서 가르친다는 것이 제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연구하게 하는데, 그리고 그 결과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발표하게 하는 데 크게 관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껏 교회의 권위라든가 어느 특정 종교나 교파의 교리 같은 학문 외적 요인에 의해 제 사고방식이나 연구 발표에 영향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저와 친한 신학자도 <예수는 없다>를 읽고 자기도 학생들에게 그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상 그걸 글로 쓰면 한국 교인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쓸 입장이 못 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제약에서는 완전히 자유스럽고 이것이 물론 제 사유방식에도 영향을 미쳤겠지요. 저는 이런 독특한 위치를 하나의 특권이요 특혜라 생각합니다.

 

캐나다 기독교도 여러 가지이지만 특히 '캐나다 연합교회' 같은 것은 완전히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노드럽 프라이어, 해롤드 카워드 같은 학자들도 캐나다 연합교회 교역자로 있던 분들로서 이런 분들이 말하는 기독교는 한국이나 캐나다 혹은 미국에 있는 한국 교포 사회에서 대부분이 받들고 있는 기독교와 엄청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이런 차이점을 신기해하고 이런 신기해함이 제가 일반인들을 위해 쓰는 글에 배어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알라딘 : 종교를 무턱대고 믿기 전에 제대로 믿을 생각을 하라고 주장하는 것을 무척 비난하기도 하는데요.

오강남 : 말씀하신 것처럼 비판자들 중에는 신앙이란 '덮어놓고' 믿는 것이지 그렇게 따질 것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요. 그러나 '덮어놓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라도 알아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는데, 신앙이라는 것은 더욱 철저히 검토되고 검증되어야 할 무엇이라 생각합니다. 잘못된 신앙은 우리의 짧은 삶을 낭비하게 하고 말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신앙이란 이성을 넘어서는 것(supra ratio)이지 이성을 거스르거나 이성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거나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이성이나 독립적 사고를 포기하거나 몰수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일수록 더욱 깊이 생각을 하며 믿어야 한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종교란 자기의 삶에 한계가 있다는 것, 뭔가 모자란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자각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삶과 우주에 대한 깊은 성찰은 건전한 종교 생활을 위해 결코 불필요하거나 방해요소가 아니라 실로 불가결의 요소라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요.

 

■ 다른 종교와 대화하는 법

알라딘 : 이윤기 씨의 책에서 오강남 씨의 책을 언급한 걸 보았습니다. 이윤기 씨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신 건지(하하핫).

오강남 : 한 20년 전 제 책이 <길벗들의 대화>(<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의 초판 제목)라는 제목으로 처음 나왔을 때 그것을 읽고 제게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때 이후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갈 때마다 연락을 하지요. <길벗들의 대화>가 수정 증보판이 나오도록 주선해 주셨습니다.

 

알라딘 : 알라딘에서 오강남씨는 <도덕경>, <장자>의 주해자로 먼저 명성을 날리셨답니다(웃음). 처음 <도덕경>과 <장자>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하신 계기랄까 그런 것은 무엇이었나요?

오강남 : 캐나다에 와서 동양 종교사상에 전념하면서 <도덕경>의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도덕경> 등도 가르쳤습니다. 캐나다 위니펙에 살 때 캐나다의 긴 겨울밤 그곳 교민들과 함께 <도덕경> 을 읽기 시작하였지요.

 

가르치면서, 교민들과 같이 읽으면서 생각나는 것을 적어 놓았다가 토론토에서 나오는 「한국일보」에 한 2년간 연재하고, 그것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도덕경> 풀이가 호응을 받았기에 이어서 <장자> 풀이도 계속해서 썼고요. 물론 종교학자로서 다른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차원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도덕경>은 제 개인적인 삶에 여러 가지로 깊은 영향을 준 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알라딘 : 현각스님도 만나신 적이 있고, 불교와의 상호작용에 관심이 있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교의 공(空)을 기독교의 비움(kenosis)과 상통하는 것으로 비교 연구해보는 식의 교리의 비교가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나요?

오강남 : 현각스님이 쓴 <만행>이라는 책에 제가 쓴 <도덕경> 풀이에서 한 페이지가 인용되어 있다고 해서 친구가 그 책을 제게 보내주어 그 책을 읽고 깊이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작년 한국에 나간 김에 그에게 연락을 했고, 마침 안동 퇴계 탄신 500주년 학술회의에 참석했던 김에 바로 옆에 있는 영주 현정사에 들려 그를 만나 즐겁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며 하루 저녁을 같이 보낸 적이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대화를 하고 서로의 가르침을 비교 연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서로 자기의 가르침을 더욱 뚜렷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가 말한 것처럼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각 종교는 자기 종교를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남의 종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종교 간의 대화는 종교인들이 그들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서로들 앞에 거울을 들어주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공(sunyata)과 비움(kenosis)의 비교도 좋지만 특히 부처님이 가르치신 '깨침'과 예수님이 첫 가르침에서 선포하신 '메타노이아'(의식의 변화)를 중심으로 서로 대화하면 크게 유익이 올 수 있을 것이라 보는 입장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기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외치신 것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라고 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 원문 "메타노이아"는 "의식의 변혁"이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의식을 가지라는 것이지요. 한편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성불하라는 것입니다. 성불이란 "깨달음"을 이루라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란 물론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이 초 일상적인 의식으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의 요점은 우리의 내면 의식을 바꾸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와 기독교는 같이 대화하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이렇게 새로운 의식으로 바꾸는데 효과적인 길인가를 서로 의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의미 있는 대화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알라딘 : '종교에 대한 토론이란 정말 가능한 것일까?'란 불안감이 들기도 합니다.

오강남 : 서양에서 보통 하는 말로 식탁에서는 종교, 정치, 섹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것을 주제로 이야기하면 모두 열이 올라 먹는 것이 소화가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종교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대화 상대자들이 열린 자세,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 또한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 혼자 다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길에서는 더더욱 독불장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처럼 각자 자기가 체험한 코끼리의 일부를 서로에게 말해주므로 코끼리의 실상에 더욱 가까운 코끼리를 알 수 있게 되지요. 진리의 길을 가는 길벗들이 서로 대화하면서 서로 물어 물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된다면 이보다 더 보람되고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알라딘 : 최근 한국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적 종교 책이 꽤 팔리고 있습니다. 큰스님들의 책이라거나, 인디언들의 범신론적 세계관을 진지하게 소개한 책 등... 이 현상은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오강남 : 서양에서는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은 아니다"(spiritual but not religious)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이런 제목의 책도 나왔습니다. 로버트 풀러라는 미국종교사학자가 쓴 책이지요. 서양사람들 사이에는 교회 등 제도적인 종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도 종교 밖에서 자기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줄 가르침이나 수행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풀러에 의하면 미국 인구의 약 20% 정도가 교회와 관계없이 이렇게 삶과 우주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고 해서 미국인들의 영적 관심이 줄었다고 속단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도 제도적인 종교에서 실망한 사람들의 수가 점증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의 경우만 보더라도 70년대 8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난 교인 숫자가 90년대에 들어와서 증가율이 둔화되고 최근에는 감소 추세라고 합니다. 현재 교회를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들의 숫자가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도 종교에 실망 내지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연히 더욱 깊은 영적 가치나 종교적 가르침의 진수에 관심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책들이 많이 읽히게 된 이유의 일부도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 현상과 관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라딘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부탁할게요.

오강남 : 마커스 보그의 <새로 만난 하느님>, 폴 F. 니터의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을 추천하고요, 곧 번역되어 나올 예정인 (한국말로 근간 예정)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평생을 불효해도, 세상으로부터 어떤 지탄을 받아도, 조건 내걸지 않고 끝없이 사랑해 주시는, 세상 하나 뿐(이셨던)인 내 편...... 내 신앙의 대상은, 오로지 자식의 무사무탈만을 기원하며 새벽 정한수 받드셨던 나의 어머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