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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천경자...죽음 뒤에 남은 말

헬로우 럭키 찬! 2015. 10. 2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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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이미지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사실 작품명에 끌려 그 속에서 매치되는 부분을 찾아내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집중하게 된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명옥씨의 팜므파탈잔혹편에 나오는 루벤스의 메두사의 머리와 매혹편에 있는 로제티의 트로이의 헬렌을 뒤섞어 놓은 것 같은 나름의 독특한 매력을 보았는데요....

 

한 평론가는 천화백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자전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22’의 숫자는 첫딸을 낳았던 1945년 당시의 나이와 관계가 있으며 평탄치 않았던 생애의 중요한 한 때, 22살의 젊은 여인을 회상하는 걸로 평을 올렸더군요.

개인적으로 그다지 선호하는 화풍이 아니라 곁눈질 정도여서 천경자씨나 작품에 대한 지식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최근 천화백의 죽음을 둘러싼 유쾌하지 못 한 소식들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면서 관심을 가지고 본 기사가 있었습니다.

 

 

 

20151028일 울산저널

<곽영화의 그림여행> ·현대 한국화단 개척한 여류화가 천경자

 

지난 22,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화가 천경자화백이 8월에 별세했다는 소식이 유가족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한국의 근·현대미술의 전개를 관통했던 대표적인 여류화가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화가로서의 유명세도 있겠지만 수년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아 많은 의문을 갖게 한 이유가 크다. 국내의 위작시비로 절필을 하고 도미하여 미국의 딸집에 머무르다 임종을 맞은 것이다. 천경자 화백의 생사의 의문과 위작시비가 그녀가 평생 쌓아온 화업의 업적과 의미를 넘어 좋지 않은 내용으로 세간에 회자되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길례언니> 41×26cm, 한국화, 1973년작

 

  천 화백은 1924년 전남 고흥 출생이며 향년 92세이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군서기관을 한 것으로 알려지며 1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가정에 태어난 화백은 당시의 전통적인 사회 분위기와 달리 17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일본으로 미술공부를 위해 유학을 갔다. 자신의 본래 이름인 옥자를 스스로 경자로 지어 유학생활을 시작하는 것에서 그녀의 강한 자의식을 읽을 수 있다.

 

천경자 화백의 작품을 왜색풍조가 강한 것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녀가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접하고 심취한 것이 일본의 채색화풍이고 이를 즐겨했던 이유로 여겨진다. 채색화는 일반적으로 일본풍의 그림을 지칭하는 말로서 일본 전통화 특유의 섬세한 필선으로 채색을 하는 방식인데 천화백은 개인적으로 이러한 화풍을 즐긴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채색화풍으로 오늘날의 국전이라 불리는 조선총독부에서 운영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을 하여 몇 차례 입선을 했다.

 

 

<아파치족 여인> 31×41cm, 한국화, 1988년작

 

일제말기의 국내 화단은 독립을 위한 항일활동과 친일활동으로 크게 양분된다. 친일성향의 작가와 미술단체의 활동은 자신의 입신을 위해 매우 교묘하면서도 때로는 노골적으로 활동을 하는데 천 화백은 적은 나이임에도 그들과 함께 활동을 하며 해방이후에 작품활동과 교수를 지내면서 한국화단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해방이후 사회전반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듯이 국내의 미술계도 일본의 채색화풍이 오랫동안 남아 미술계의 극복되어야 할 주류이기도 했다. 천경자 화백은 해방이후 광주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며 1954년부터 1973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천화백의 1951년도 작품 생태는 그녀를 한국화단의 주요 작가로 성장시킨 작품으로 알려진다. 35마리의 뱀이 화면을 가득매운 작품이다. 그녀는 이 그림을 한국전쟁의 혼란기에 폐병으로 죽은 여동생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결혼생활의 파국 등 당시 자신의 처지와 연관시켜 작품제작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수필로 쓰기도 했는데 매우 독특한 소재로서 당시에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뱀을 파는 가게를 오랫동안 드나들며 뱀을 관찰하고 스케치를 했던 것을 글에 언급한다.

 

 

<황혼의 통곡> 94×128cm, 한국화, 1995년작

 

천경자 화백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로서 알려진다. 왜색풍의 화풍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한국 화단에서의 그녀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분단의 역사와 이념과 표현의 제한 속에서, 혹은 여성으로서 작품을 제작한다는 사회통념의 편견 속에서 자유로운 여성의 삶과 여류작가로서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천 화백의 죽음을 맞아 또다시 회자되는 미인도는 아직도 그것의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그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부장이 소장해 왔던 그림이다. 저격사건 이후 다른 물품과 함께 그림도 압류되어 국가소유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으며, 1991년에 그림이 전시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미술관을 찾은 천 화백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 그림을 모작한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천 화백은 내가 낳은 자식인데 내가 왜 모르겠느냐?”고 항변을 했고 미술관은 진위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미술관의 진위여부 검증은 결과적으로 진품으로 확인되어 논란과 갈등이 오히려 증폭하게 된다.

 

 

문제의 작품 <미인도>/1977

 

작가가 자신이 그린 모든 그림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인데 미술관에서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버린 것이다. 결국 작품의 진위여부는 법정으로 전개되었는데 법정에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려 세인의 관심을 크게 확대시켰다. 이후에도 진위여부 검증은 진행되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과학기술원에서 감정을 하였으나 여기서도 진품으로 결론을 내렸다. 천 화백은 자기가 그린 그림도 모르는 화가라 여겨지기도 해서 마음의 상처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천화백은 이 일로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품으로 오도하는 화단풍토에선 창작행위 자체가 아무런 의미 없다면서 절필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예술원도 탈퇴한다. 미국으로 떠난 화백은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자신의 작품 93점을 기증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났으며 이후로는 귀국하지 않았다. 2013년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거동이 불편했으며 뉴욕에 있는 딸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된 이후에는 국내의 화단과는 소식이 두절되었다. 한때는 사망설이 나돌아 대한민국 예술원에서는 매월 지급하는 보수도 지급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천 화백은 1983년에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기도 했으며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선정하는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작가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작가의 생전모습

 

남은 자녀들로 인해 더 이상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도록... 조용하고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