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끝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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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따라서..../단상 또는 일상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

헬로우 럭키 찬! 2011. 9. 1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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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없다. 하루의 해가 저물면 옷을 벗듯이 영혼은 몸이 잠들 때 그 몸을 벗는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스스로에게  위해를 가하면서까지 서둘러 세상을 버리는 사람이 조금은 줄어들까?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질곡의 하루 해는 이윽고 저물어갈 텐데...

그 서러운 삶의 기억들도 언젠가 레테를 건너는 순간 망각으로 치유될 수 있을 텐데.....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현실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차원으로 갈 수도 있...을.....

 

오늘은 참으로 황망한 하루였다.

출근 직후, 복도에 서면 바로 보이는 건너편의 오래된 주택 창문 틀에 목을 멘 노인의 시신을 보고 말았다. 넋 나간 상태의 내 시선을 길게 붙잡은 것은 한 손에 꼭 쥐고 계셨던 종이 한 장이었고 유서 인듯한 그 종이는 종일 내 눈 앞을 어지럽혔다.

 

고래로 우리 민족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호상이라 하여 오복 중의 하나로 꼽았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영육을 다치지 않고 행복하게 살다 갈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소망스런 일이 어디 있을까만, 인간의 삶이란 게 하나같이 제각각인데다 그 무게를 견디는 심지 또한 개개인이 다 같지 않다는데서 비극은 시작된다.

사람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운명이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불우한 환경에 처해진 많은 사람들이 태생을 원망하며 그 올가미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 종당에는 불공평하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절규하면서 스스로 생명의 끈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그들의 절망은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학벌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명예와 권력을 쥘 수 없어서라기보다 그것을 가진 사람들의 횡포에 절망하고 또한 그 현실이 결코 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려움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살아 숨 쉬는 모든 이에게 단 하나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일 터.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 죽음은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명제이며 곧, 자살이라는 유일한 히든카드가 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자살을 찬성한다든가 동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목사의 손가락 끝에 매달린 천국은 멀기만 하고, 현실의 고단한 삶은 결코 개인의 의지 하나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아득함.....누구랄 것도 없이 현상적인 부분만으로 그것을 찰나의 미숙한 행위라고 함부로 속단 하지는 못 할 것 같아서이다.

 

 

 

나를 위해 살아도 괜찮단다. 제목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쏟아 질 것만 같다. 그리고 이내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언젠가...넷을 배회하던 중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짧은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삶을 스스로 끝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삶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면 언제든지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철회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므로 죽음도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최악의 순간, 자위自慰로서의 살인은 용서받을 수 있을라나? ....또 헛소리 나온다.

 

아마도 한동안은 나의 넋이 제 집 찾기에 소홀할 거 같다.

 

* 서글픈 시 한 편 첨부.. 

 

어떤 노인의 죽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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