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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탄이라는 나라/국민의 97%가 행복하다는...

헬로우 럭키 찬! 2015. 9. 1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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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불식 간에 마우스부터 움직이게 한 기사입니다.

지구상 마지막 샹그릴라’, ‘때 묻지 않은 은둔의 왕국’....국민총생산을 논하지 않고 국민총행복지수(GNH·gross national happiness)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개발과 경제성장보다 전통과 평등, 행복을 중요시하는, 국민의 97%가 스스로 행복하다는 나라.....부탄.

 

학창시절 지리수업시간(으로 짐작합니다만), 다른 나라에 묻혀 잠시 기억에 머물렀다 이후 잊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아직도 지구상에 천국의 평화를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국가가 있다니...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라는 스피노자의 격언은

부탄 사람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다음 생에서 어떤 삶을 살지는 현세에서 얼마나 바르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다.”

더 가지려는 욕심도, 더 누리려는 욕망도 평화로운 이 땅에선 부질없게 느껴진다.

여행객이 몰리는 곳엔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이 있기 마련인데 부탄은 예외다.

심지어 기념품을 사러 들른 공예품 상점에서도 주인은 파는 데엔 관심이 없는 듯 아무것도 권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음세계를 진정으로 의식하는 순간 삶에 평화가 깃드는 것 같습니다.

 

한국경제 신문 914이하람씨의 부탄 여행기는 그들에 대한 호기심에 발동을 걸었습니다.

개별 자유여행 금지, 사전에 부탄 전문 여행사를 통해 부탄왕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여행 팁까지 알려 주는

이하람씨의 여행기를 아래 사이트로 접속해서 한 번 읽어 보시기를....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91369821

 

 

 

 

 

몇 개의 경로를 통해 알아 본 부탄입니다.

 

 

daum백과사전

부탄 역사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남쪽으로 이주하던 티베트인들이 9세기초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17세기에 티베트에서 온 영향력있는 라마교 승려 솁톤 라 파가 부탄의 왕이 되었고 다르마 라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부탄은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실체를 이루게 된 듯하며 그후 라 파의 뒤를 이은 돕게인 솁톤이 펜로프(영주중펜(성주)들을 임명하는 등 부탄의 행정 체계를 공고히 했다.

 

그의 후계자는 정치와 종교 양 측면에서 권력을 행사했던 돕게인 솁톤과는 달리 종교적 역할만을 담당하는 한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대리인을 세워 데브 라자의 칭호를 주고 그에게 모든 정치 실무를 담당하게 했다.

이와 같이 종교적 영역에서는 다르마 라자, 정치실무면에서는 데브 라자가 통치하는 2(二元) 통치형태는 20세기초 마지막 다르마 라자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적 지도자인 다르마 라자라는 직위는 죽은 다르마 라자의 윤회(輪廻)가 입증되었다고 여겨질 때 승계되었는데, 마지막 다르마 라자가 죽었을 때에는 이러한 영혼의 윤회를 찾아볼 수 없었고, 따라서 이 직위와 이에 대한 예배의식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세기에 부탄은 세력을 확장하려는 여러 지방영주(penlop)들이 벌인 연이은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데브 라자의 직위는 이론상으로는 펜로프들과 중펜(jungpen : 요새 통치자)들의 협의회에서 선출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가장 세력이 큰 통치자, 즉 파로(Paro)의 펜로프나 통사(Tongsa)의 펜로프가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브 라자가 임명하기로 되어 있는 펜로프도 실제로는 이 직위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의해 결정되었다.

 

여러 해 동안 반역과 전쟁이 전국 각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났고, 여기에서 패하여 중펜이나 펜로프의 자리를 잃게 된 자들은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1907년 오랜 기간 가장 강력한 펜로프로 떠올랐던 통사의 펜로프가 둑곌포()가 되어 영국에 의해 부탄의 유일한 통치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습왕조를 수립했다. 그의 손자인 지그메 도르지 왕추크는 개화된 통치자로서 가능한 한 전통적 가치들을 보존하면서 국가의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발전을 추구하려 했으며 1972년 그가 죽은 후 대를 이은 아들 지그메 싱예 왕추크 역시 진보적인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20세기말 부탄인으로 귀화하라는 권고를 무시하는 4,000명 이상의 티베트 난민들 때문에 다소 불안정한 정세가 이어지고 있다.

  

 

from 위키백과

 

역사

부탄의 옛 기록은 화재와 지진으로 소멸되어 신비에 싸여 있다. 8세기경에 Guru Padma Sambhava가 비호의 등을 타고 티벳에서 부탄으로 날아와 타루 벨리에 있는 호랑이의 거처인 탁창(Taktsang)에 왔다는 전설이 있다. 부탄은 16세기부터 푸나카 사원의 대승정(大僧正) 다르마 라자의 지배를 받았고, 행정의 실무는 데프 라자(副王)가 행하므로 승·(僧俗)의 이중 통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의 군()에는 토후(土侯)가 있어서 그 지배력이 강하였다.

 

1907년 중부에 있던 통사군의 군수(郡守) 우겐 왕추크가 왕위(마하라자)를 선고하고 영국에 의해 유일한 왕조로 인정받음으로써 부탄에 군주제가 성립되었다. 이후 인도와 조약을 맺어 인도에 외교권을 위임하였고 194988일 독립하였다. 국왕 지그메 도르지 왕축은 개화된 통치자로서 전통적 가치 보존과 함께 국가의 발전을 추구하려 하였다.

 

() 국왕 지미 싱게 왕추는 제4대 왕으로 1972년에 16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그 후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이 2006년 즉위했으며, 2008년 입헌 군주제 수립을 위해 의회 선거가 2008324일에 있었다.

 

지리

부탄은 인도 북동부, 히말라야 산맥의 동단부에 있는 인도의 보호국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표고 2,000m를 넘고 고지에 있는 네팔보다 한층 더 원시적인 비경(秘境) 지대이다. 고지이기 때문에 기온은 비교적 온화하나 강우량이 많아 연간 3,000~5,000정도나 된다. 그러나 계곡 바닥은 기온도 높아 아열대성 동식물이 있다.

 

부탄 왕국은 히말라야의 동쪽에, 북으로는 티베트와 남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및 벵갈 서부지방과 국경을 이루고 있다.

 

면적은 약 47,000로 중앙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고 산들로 둘러싸인 내륙 국가이다. 7,300미터에 이르는 히말라야 산맥의 티베트 고원과 경계를 이루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높이가 낮아지면서 비옥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계절풍(몬순)은 이 지역에 산림을 풍성하게 했으며 높은 곳에는 산악인들이 거주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경작이 가능한 중부와 히말라야 언덕에 인구가 밀집해 있다. 남쪽의 Daurs 평원은 히말라야 산맥 보다 고도가 낮아 아열대 숲과 열대 초원(사바나),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져있다.

 

 

정치

부탄은 히말라야 산중의 소국으로 1907년 우겐 왕추크가 즉위한 이래 세습군주제가 실시되었고 1910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47년 인도의 독립과 함께 영국의 지배를 벗어났고 194988일 인도로부터 데완기리 지방을 할양받고 매년 국고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인도에 외교권을 위임했다. 196411월 궁정 쿠데타로 렌다프도르지 수상을 내쫓고 국왕이 친정을 베풀기 시작했으며 마하라자 왕축 국왕이 사망하자 1972년 황태자인 지미 싱게 왕추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008324일 부탄 총선이 실시되어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시행하였다.

 

 

부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부탄을 최초로 통일한 샤브드룽 나왕 남걀(Shabdrung Ngawang Namgyal)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동화 같은 곳, 부탄

- 왕권을 내려놓고 은둔생활을 한 부탄의 영웅 샤브드룽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41695&CMPT_CD=P0002013.12.31 에서 발췌

 

◈ 부탄을 최초로 통일한 영웅 샤부드룽

타시쵸 드죵은 1216년 걀와 라낭파(Gyawa Lhanangpa)라는 스님에 의해서 건설되었는데, 당초 이름은 '파란 돌로 만든 성'이란 의미를 가진 '도젠 드종(Dho Ngen Dzong)'이었다고 한다.

 

13세기 당시 부탄은 전통 닝마파 불교 대신, 후에 부탄의 국교가 된 드럭파(뇌룡파)가 티베트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다. 뇌룡파 불교를 최초로 전한 인물은 티베트의 '파죠 드럭공 싱포'로 그는 당시 반대파였던 '각규파'와 치열한 싸움을 치른 후 부탄의 불교를 뇌룡파로 통일한다. 파죠 드럭공 싱포는 이 타시쵸 드죵에 머물며 뇌룡파 중흥의 기초를 다졌다. 그 후 부탄을 최초로 통일한 샤브드룽이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뇌룡파 불교가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부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부탄을 최초로 통일한 샤브드룽 나왕 남걀(Shabdrung Ngawang Namgyal)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알아야 한다. 부탄역사에서 '샤브드롱'은 불세출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616년 티베트 중부에 있는 뇌룡파의 본산인 랄룽사원에서 부탄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나이 23세에 꿈에 수호신장인 마하칼라로부터 부탄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고 부탄으로 건너왔다.

부탄 전역을 설법을 하며 돌아다닌 그는 점차 부탄의 종교지도자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샤브드룽은 스스로 '만인의 경배를 받는 고귀한 보석'이라는 의미의 '샤브드롱 린포체'로 개명을 하고, 팀푸 남쪽 기슭에 자신의 거처로 '심도카 드죵(Semtoka Dzong)을 건설한다. 사원이면서 행정적 기능과 방어의 목적을 두루 갖춘 심도카 드죵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후에 부탄에 건립되는 수많은 드죵의 모델이 된다. 부탄에는 심도카 드죵을 모델로 한 사원이 2000개가 넘게 전국에 건설되어 있다.

 

샤브드룽의 반대파들이 티베트에 원군을 요청하고 라다크 군대와 연합을 하면서까지 심도카 드죵을 공격했으나 함락되지 않는다. 티베트와 10년간에 걸친 종교전쟁은 샤브드룽이 이끈 민병대의 승리로 끝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마침내 부탄의 최고 실력자로 등극한 샤브드룽은 한때 수미산을 포함한 네팔의 북부지역 티베트 땅까지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

 

그러나 1644년 몽골군까지 합세한 제2차 부탄-티베트 전쟁이 발발한다. 몽골 연합군을 몰고 부탄을 공격한 달라이 라마 5세는 부탄 국경을 넘어 중부 붐탕지역까지 진군하였으나, 샤브드룽은 지형지세를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몽골-티베트 연합군을 무력화 시키고 만다.

 

마침내 샤브드룽은 티베트에서 부탄에 온 지 39년만인 1655년 부탄을 통일하고 부탄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광활한 영토를 지배한다. 그는 부탄의 진시황제와 같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한편 샤브드룽은 티베트와의 지긋지긋하고 오랜 전쟁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뇌룡파를 국교로 정하고 뇌룡파 전통 승가를 확립시키는 한편 전국 각지에 요새를 세워 국방을 튼튼히 한다.

 

샤브드룽은 티베트의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 부탄만의 고유문화를 확립하는 길만이 부탄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티베트의 장발머리를 단발로 바꾸고, 의복도 부탄 전통 복장인 고(Gho)와 키라(Kira)로 바꾼다.

세금제도를 확립하고, 국민의 부역제도를 신설하여 교량, 사원, 성채 도로 등 기간시설을 건설한다.

 

샤브드룽은 도젠 드죵이라 불렸던 성의 이름을 현재의 '타쉬쵸 드죵'으로 바꾸고 한 개의 성을 더 증축했다. 그는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여 이원집정부제로 만들었다. 그리고 샤브드룽은 '제켄포(Je Khenpo)'라 불리는 대수도원장직을 겸임하게 된다.

 

기존의 건물을 종교의 수장인 샤브드룽 자신이 쓰고, 새로 만든 건물은 정치적 수장인 '데시(Desi)'가 사용하게 하였다.

데시는 정치와 외교를 담당하는 수상격인 사람이다. 데시가 왕과 다른 점은 세습이 아닌 선출직으로 부탄의 정사를 관장하는 통치자 역할을 했다. 최초의 데시는 샤브드룽이 임명을 했으나 그 후에는 선출직으로 바뀌었다.

 

왕권을 내려놓고 은둔 생활을 한 샤브드룽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말년의 행적이다. 1651년 샤브드룽은 데시에게 국가경영 일체를 맡기고 은퇴를 한다. 그리고 푸나카 드죵으로 거처를 옮겨 장기간 칩거에 들어간다.

 

이는 마치 로마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를 은퇴하고 그의 고향 달마티아(현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로 귀향을 하여 채소를 가꾸며 말년을 보낸 행적을 떠올리게 한다.

 

갑자기 푸나카 드죵에 은둔을 한 샤브드룽의 모습을 1651년 이후로 아무도 본적이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사망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은둔 54년 만인 1705년에 대승원장 제켄포에 의해 그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발표된다. 제켄포는 샤브드룽의 죽음을 발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샤브드룽은 입멸 후 그의 시신에서 육신, 말씀, 영혼을 상징하는 삼색의 빛이 발하였습니다. 그분은 육신, 말씀, 영혼의 형상으로 다시 환생을 할 것입니다."

 

그 후 샤브드룽은 부탄에서 불멸의 성인으로 추대되어 수호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샤브드룽 사후에 등장한 '데시'들은 그들 모두가 샤브드룽의 화신인 '샤브드룽 린포체'라고 주장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 '린포체''환생'을 의미한다. 샤브드룽 린포체로 인정을 받을 만큼 영향력 있는 데시도 있었으나, 대부분 데시들은 반대파에 의하여 비난을 받거나, 심지어 폐위되기도 했다.

 

샤브드룽이 사망을 한 후 부탄은 200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지는 당파 싸움 속에 영국이라는 제3세력의 개입으로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쌈지역을 중심으로 영국과의 영토분쟁이 계속되는 동안 통사의 성주였던 지그메 남걀이 최고 권력자로 등극을 한다. 187051번째 '데시'로 등극을 한 그는 17살 짜리 아들 우겐 왕축을 파로의 성주로 임명을 한다. 우겐 왕축은 후에 부탄왕국의 초대 왕이 된 인물이다.

 

우겐 왕축은 1904년 티베트로 진군하는 영국을 돕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우겐 왕축의 도움으로 티베트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영국은 그에게 ''이라는 작위를 수여한다. 부탄의 최고 권력자가 된 우겐 왕축은 1906년 영국 웨일즈 황태자의 초청으로 당시 인도의 수도였던 콜카타로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일약 세계적인 명사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071217일 영국의 지원 하에 대관식을 거행하고 부탄의 초대 왕으로 등극을 한다. 그에게 '드럭 걀포(Druk Gyalpo)라는 호칭이 수여되는데, 이는 '용왕'이란 뜻으로 용의 나라 부탄의 왕을 의미한다. 그 이후 부탄은 왕정시대를 맞이하며 지금의 5대 국왕까지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