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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의 역사와 오늘

헬로우 럭키 찬! 2015. 9. 1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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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http://search.daum.net

 

최근에 알게 된 한국전쟁 참가국 에티오피아와 셀라시에 황제의 강뉴부대가 궁금해져 인터넷 정보를 헤집고 다녔습니다. 가장 최근의 뉴스가 먼저 눈에 들어오더군요.

정국의 혼란을 틈타 양의 탈을 쓰고 얼굴을 들이미는 예의 그 수법....

미국의 대표 주자 발언이 논란 거리로 올라와 있네요.

오랜 역사에도 5년의 이탈리아 지배를 제외하면 제국주의 열강의 땅따먹기 광풍을 용케도 피해 간 강단진 나라 .... 천의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을 방문해 보고 싶은 욕구가 발동했습니다.

 

 

2015.07.28. 연합뉴스에서 발췌한 부분입니다.

아프리카 순방에 나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독재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에티오피아 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인권감시단체들에 따르면 5월 총선에서 에티오피아 정부는 야당 후보들의 등록을 방해하고,

돈과 지지자들을 동원했으며, 평화시위마저 불허하거나 참가자들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비드 크레이머 전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 담당 차관보는 NYT와의 인터뷰에서

 "에티오피아 정권은 매우 억압적"이라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반대로 이야기한 것은

그곳의 진짜 상황을 잘못 전달한 것이자,

인권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현지인들의 사기를 꺾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의 워싱턴 지부장인 세라 마곤은

"광범위한 폭력이나 노골적인 부정투표는 없었을지 몰라도 최근 에티오피아의 투표는

전혀 민주적인 선거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1년 체포됐다가 최근 풀려난 현지 언론인 리요트 알레무(35·)

"에티오피아는 오바마 대통령과 국제사회 앞에서 그들이 민주적이고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다"며 에티오피아 정권을 믿지 말라고 경고했다. ’


그럼에도 오바마 대통령이 에티오피아의 인권 문제를 '속시원히' 꼬집지 않은 것은

이 나라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알샤바브 격퇴와 남수단 종족 갈등에서

중요한 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NYT는 분석했다.’

 

첨부이미지

 

외교부에서 제공한 2011년도판 에티오피아의 개황을 개인적인 관심 순으로 읽기 편하게 옮겨 봤습니다.


역사

1.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에티오피아 역사

BC 800~ BC 500년경 고대 에티오피아 왕국이 건설되었다. ‘에티오피아태양에 그을린 얼굴의 땅(Land of the Burnt Faces)’이라는 의미이다. 전설에 따르면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 사이에 태어난 메넬리크 1(Menelik )가 초대 황제로 알려져 있다.

에티오피아는 기원후 1세기부터 13기경까지 악숨(Axum) 왕조 시대였다. 6세기부터 1930년대까지 에티오피아는 준독립 상태의 지방 귀족이 활약하던 봉건 왕조 국가였다. 이 시기에 교리상의 차이로 서구 기독교 문화와 단절된 문화가 형성되었다.

1882년 이탈리아 정부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에리트레아에 현지 관리청을 설치하고 식민지 개척에 나섰고 1889년에는 에티오피아의 요한네스 4(Yohannes , 1831~1889, 재위 1872~1889) 국왕을 전사시킨 후 수도 아스마라(Asmara)에 입성하였다. 이탈리아 측은 요한네스 4세가 죽은 뒤 황제가 된 메넬리크 2(Menelik , 1844~1913)와 맺은 우치알리(Ucciali) 조약으로 에리트레아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다.

18962월 메넬리크 2세가 아디스아바바 북쪽에 있는 아도와(Adowa)에서 벌인 전투에서 이탈리아를 격퇴하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에리트레아는 아디스아바바 조약에 따라 에티오피아에서 분리되어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2.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시대(1900~1974)

에티오피아는 193510월 이탈리아에 침공 당했다. 당시 이탈리아군이 겨자 독가스를 사용하는 등에 의해 에티오피아인 약 27만 명이 희생되었다.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황제는 이탈리아에 저항하다 패배하고 1936년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4월 에티오피아의 이탈리아군을 공격하여 에리트레아를 접수하였다. 19415월 셀라시에 황제가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함으로써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점령이 종식되었다.

1944년 영국-에티오피아 협정에 따라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1950년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를 자국 연방에 속하는 영토로 편입하였고 1962년에는 자국의 1개 주로 강제 합병하였다. 이에 에리트레아 분리 항쟁이 시작되었다.

1962년 셀라시에 황제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 주권을 수호하고 단결과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아프리카통일기구(OAU)1)발족에 중요한 역할을 하여 초대 의장을 맡았으며 아프리카통일기구는 본부를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두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는 양국 국경에 위치한 오가덴(Ogaden)을 놓고 분쟁을 겪었다.

셀라시에 황제는 집권 초기에 개혁적 성향을 띠어 국민의 의무교육 확대, 노예제 폐지,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 등 강력한 사회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집권하는 동안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안정적이고 잘사는 선진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집권 말년에 접어들면서 실업 문제와 기근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주로 북동부 지역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인해 1972년에서 1974년 사이에 약 4만 명에서 8만 명 정도의 에티오피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가운데 제정(帝政)에 반대하는 세력이 증가하였고 1974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 중령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셀라시에 황제를 축출하여 제정을 폐지하고 데르그(Derg)2) 공화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셀라시에는 1975년 궁전에서 군인들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3. 에티오피아의 군부집권 이후 시기(1974~1991)

1974년에 에티오피아의 공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공산 군부는 하일레 살레시에(Haile Selassie) 황제를 축출하고 암하라어로 데르그(Derg)1)라 불리는 임시군사행정위원회(PMAC, Provisional Military Administrative Council)를 설치하였다.

1975년 군사정부는 주요 산업과 금융기관, 토지와 도시민의 재산을 국유화하며 사회주의 정권 수립을 추진하였다. 군부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 중령이 19772월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4월 미국 군사고문단이 에티오피아에서 철수하고 소비에트연방, 쿠바 등 사회주의국가에서 에티오피아에 군사원조를 시작하였다. 197811월 에티오피아와 소비에트연방은 20년간 유효한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에티오피아는 소말리아와 접한 국경 지역 오가덴(Ogaden)을 두고 1964~1973년에 이어 1977년 다시 분쟁하게 되었다. 19808월 아프리카통일기구(OAU)2)특별회의에서는 에티오피아-소말리아 간 독립 당시의 국경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1987614일 에티오피아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그해 99일 인민회의(National Shengo)가 구성되었다. 912일에는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Ethiopia)이 선포되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멩기스투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멩기스투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해 온 티그라이 인민해방전선(TPLF)3)은 다른 저항 세력들과 연합하여 1989년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4)을 형성하였다.


4. 에티오피아의 과도정부 수립(1991~1995)

1991528일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1)이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하여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의 공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해 7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saias Afewerki)가 이끄는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2)도 에리트레아의 수도 아스마라(Asmara)에 입성하여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199171일부터 5일까지 열린 에티오피아의 평화와 민주주의에 관한 국민회의는 의회를 구성하고 2년간의 과도정부 집권기를 규정하는 한편 에리트레아 주민의 자결권을 인정하였다. 722일 에티오피아 의회는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멜레스 제나위를 선출하고 과도 기간 중 최고법으로서 헌법을 채택하였다. 123일에는 신()경제정책을 채택하고 1992525일에는 투자 촉진법을 제정하였다. 199331일에는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946월에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한편 19934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동안 에리트레아 독립에 관한 주민 투표가 실시되어 99.8%가 독립을 찬성함에 따라 524일 에리트레아 독립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1962년 에티오피아에 강제 합병되었던 에리트레아라는 국명이 아프리카 지도에서 부활하였다.


5. 에티오피아의 연방민주공화국 수립

o 에티오피아의 제1, 2차 총선(1995~2005)

에티오피아에서는 199557일 총선이 실시되었다. 에티오피아 최대 종족인 오로모족과 암하라족 일부가 된 중심이 된 반정부 단체가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총선에서 집권 세력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1)이 압승하였다. 그 해 822일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이 출범하여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과도정부(1991~1995) 대통령이던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를 초대 총리로 선출하였다.

19985월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양국은 2000618일과 1212일에 알제리의 수도 알제(Algiers)에서 정전협정과 평화협정(Algiers Agreements)을 체결하고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위원회(EEBC)2)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바드메(Badme) 읍을 에리트레아에 속하게 한 국경위원회의 결정에 에티오피아가 불복한 이래로 양국의 국경 분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2000514일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의 제2기 총선이 실시되어 집권 중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 민주전선이 압승하였으며 제2기 정부의 총리로 멜레스가 재선되었다. 20014월 학내 민주화 요구로 시작된 학생 시위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발전하였다. 그 여파로 멜레스 총리에 반대하던 네가소 기다다(Negasso Gidada) 대통령이 20016월 사임하고 8월에는 연방 의회(상원) 의장 알마즈 메코(Almaz Meko)가 미국으로 망명하는 등 일련의 정치 불안 사태가 발생하였다.

2001108일 기르마 월데기오르기스(Girma Wolde-Giorgis)가 에티오피아 연방 민주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데 이어 정부 조직의 대규모 개편과 개각이 단행되면서 멜레스 총리의 안정적 권력 기반이 재확인되었다. 멜레스 정부는 국내적으로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에 주력하는 한편, 이라크 전쟁과 관련하여 미국에 에티오피아 영공 통과 및 기지 사용권을 제공하는 등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와의 협조 체제를 공고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외국의 원조에 힘입어 가뭄 등 당면한 재난을 극복하고 빈곤을 퇴치하는 데에도 일정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멜레스 총리를 비롯한 집권 중심 세력은 소수 종족인 티그라이족으로 이에 저항하는 오로모 해방전선(OLF)3)과 야당, 학생들의 반정부 활동이 전개되었다. 더욱이 만성적 기근이 든 데에다 경제체제 개혁이 실패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정국 불안이 심화되었다. 2003년 가뭄으로 인한 흉작으로 약 15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놓여 국제사회의 식량 원조로 겨우 연명하였다. 아디스아바바의 경우 약 140만 명의 경제활동 인구 중 정부 발표로는 약 30만 명, 언론 추계로는 60만 명 정도가 실업 상태였다. 200312월에는 서부 국경 지역인 감벨라(Gambela)에서 토지와 거주권 문제를 둘러싸고 종족 간에 갈등이 일어나 수백 명이 사망하는 유혈 충돌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정부군과 경찰에 의해 질서가 회복되었으나 여전히 종족 간 반목과 갈등이 심하여 폭동이 재발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20041월에도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와 오로미아(Oromia) 주를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하는 등 종족 분쟁 및 민주화 요구 움직임이 지속되었다.


o 에티오피아의 제3, 4차 총선(2005~2010)

에티오피아 연방민주공화국이 1995년 성립된 이후 제3차 총선이 2005515(소말리 주는 821)에 실시되었다. 총선에서 집권당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4)이 과반수를 넘는 327석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야당에서 부정 투·개표를 주장하면서 야당과 대학생 등의 시위가 일어났다. 68일 시위 진압대의 발포로 아디스아바바 시에서만 40여 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하였으며 이러한 소요 사태로 에티오피아에서 약 10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연행되었다. 200589일 에티오피아의 선거관리위원회는 492개 선거구 중 여당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이 하원 전체 의석의 과반수가 넘는 296석을 확보하였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통일민주연합(CUD)5), 연합에티오피아민주전선(UEDF)6) 등 야당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국회 보이콧 등을 주장하여 정세가 불안하였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야당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각 정당이 제기한 선거 및 투·개표와 관련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재조사 결과 32개 선거구 590개 투표소에 대해 재선거 실시를 결정하였다.

20097월 에티오피아 의회는 내각이 상정한 테러 방지(Anti-Terrorism) 법안을 통과시킨 바,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이 법안이 20105월로 예정되어 있던 총선과 연관하여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재판을 제한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였다.

2010523일에는 제4차 총선이 실시되었다. 선거운동 시기에는 주요 야당 후보들이 살해당하고 폭탄 테러가 일어나는 등 긴장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투표 당일에는 매우 평온했으며 투표 참여율도 높아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과 아프리카연합(AU)7) 참관인단의 평이 긍정적인 편이었다.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 총리는 이 총선을 계기로 총리직을 사퇴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으나 당시 야당이 정치적으로 매우 약하고 여당 내에서도 멜레스 총리를 대체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 다수의 평가였다. 그리하여 총선에서 재차 승리할 경우 매년 각료급 인사들을 신세대(young blood)로 교체하고 2015년에 총리를 교체하기로 결정하였다. 여당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 민주전선은 이 총선에서 전체 의석 547석 중 499석을 확보하였으며 멜레스 총리는 2010104일 제4대 총리로 재취임하였다.


지리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1)’이라 불리는 지역에 있는 내륙 국가이다. 아프리카의 뿔은 아프리카 대륙 동북부 홍해 연안동쪽 끝에 코뿔소의 뿔처럼 튀어나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며 가장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소말리아와 지부티가 있고 그 다음에 에티오피아가 있다. 에티오피아 서쪽에는 수단, 북쪽에는 에리트레아, 남쪽에 케냐와 소말리아 일부가 접하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터키에서부터 아프리카 남부의 모잠비크까지 이어지는 동아프리카 지구대(East African Rift)에 자리하고 있어서 국토가 대부분 고산지대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만하게 융기한 지층의 상층부에 유동성이 큰 현무암이 덮여 이뤄진 고원은 극히 평평하나 청나일(Blue Nile) 강을 비롯한 몇 개의 강과 그 지류에 의하여 깊은 협곡이 생겨났다. 에티오피아는 해저 116m의 다나킬 저지(低地)2)에서 에티오피아의 최고봉인 라스다샨(Ras Dashan)의 해발 4,620m까지 분포되어 있다. 중부 고원지대의 평균 해발은 2000m~3000m이다.


기후

에티오피아 인구는 대부분 국토의 약 1/4를 차지하는 해발 2000m 이상의 고원 지역에 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날씨 때문이다. 고원지대는 아프로-알파인(Afro-Alpine) 고산기후로 평균 기온이 16~ 22이며 연중 기온 변화가 적다. 반면 저지대는 기온이 높고 습기가 많은 열대기후 아래 놓이나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기후가 나타나는 지역도 넓은 편이다.

우기와 건기의 길이가 지역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4기로 분류된다. 4~5월이 온건기[베가(Bega)], 6~9월이 대우기[키렘트(Kiremt)], 10~1월이 냉건기[메헤르(Meher)]이며 2~3월은 소우기[벨그(Belg)]이다. 연평균 강우량은 1000~1500정도이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매우 크며 강우량이 대부분 우기인 6~9월에 집중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건기에도 비가 오는 등 이상기후가 나타나 농사 주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민족

에티오피아는 80여 개 이상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이다. 셈족(Semites)계와 함족(Hamitic)계 후예인 오로모족이 전체 인구의 약 35%이고 암하라족 27%, 티그라이족 6%, 소말리족 6%, 사다마족 4%, 구라지족 2.5% 등이며 그 외 소수민족이 있다. 지방행정도 민족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어 북쪽에 암하라와 티그라이, 남쪽에 오로모, 동남쪽에는 소말리 민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다.


종교

2007년 조사를 기준으로 에티오피아 전체 인구의 약 43.5%(3700만 명)가 에티오피아 정교회(Ethiopian Orthodox)이며, 31%(2800만 명)가 이슬람교이다. 개신교는 18.6%(1570만 명)를 차지하며 그 밖에 토착 종교들이 있다.

 

문화

에티오피아는 국민을 이루는 인종이 약 80여 종으로 추정되어 인종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족 간의 이해 대립 요소가 내재하여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 루시(Luch)는 약 30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까지 발견된 인류 화석 중 가장 오래되었다. 에티오피아는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양한 문화적 전통과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특히 기독교 문명이 일찍 전래되어 인구의 약 절반이 에티오피아 정교회1) 신자이다. 랄리벨라(Lalibela) 교회2), 악숨 오벨리스크(Axum Obelisk), 곤다르(Gondar)의 고성 등 고대 기독교 문명이 낳은 유산이 많다. 이슬람교도 일찍 전래되어 에티오피아의 하라르는 이슬람 4대 성지 중 한 곳이며 이슬람교도가 전체 인구의 30%를 넘고 현재에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공용어인 암하라(Amhara)어는 아프리카 국가 언어 중 드물게 고유문자를 보유하고 있다.


관광사업

에티오피아는 오랜 문화적 전통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으며 특히 랄리벨라(Lalibela) 마을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교회, 악숨 오벨리스크(Axum Obelisk), 곤다르(Gondar)의 고성 등 고대 기독교 문명의 문화유산이 많다.

에티오피아의 고산지대는 크게 건기와 우기로 기후가 구분되며 건기에는 고산기후가 나타나 늘 청명하고 쾌적하다. 에티오피아는 12개월로 이뤄진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이 아닌 율리우스력(Julian Solar Calendar)을 사용하여 1년이 13월까지 있다. 그와 관련하여 ‘13 months of sunshine’을 관광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다.

에티오피아는 오랜 전쟁과 가난으로 관광 기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관광객의 급속한 증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풍부한 문화유산과 뛰어난 자연경관 등으로 관광 잠재력은 큰 편이며 평화 회복과 정치 안정으로 관광객 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특히 1930년대에 이탈리아 침공 시 약탈당한 악숨 오벨리스크를 20054월에 반환 받은 것을 계기로 관광산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에서도 약탈 또는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 받기 위해 적극 노력하며 유네스코(UNESCO)1)이사회와 세계문화유산 위원회 등 관련 국제기구에 진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