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몇 장을 남겨 두고 책장을 덮었다.
숨을 고르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더 이상 진도를 낼 수가 없었던 탓이다.
'엄마, 처음으로 돌려보내 줘요. 제일 처음의 어둠이라면 혼자서도 견딜 수 있을 거예요. 사람은 반드시 혼자 태어나니까. 게다가 머지않아 밝아질 어둠이죠. 엄마니까 할 수 있는 일이예요. 엄마니까 날 처음으로 돌려보낼 수 있어요.’...축축한 병원의 한 귀퉁이에 주저 앉아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린 엄마에게 장전된 권총을 손가락에 걸어주는 모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 젖은 눈으로 남아 있을 두 사람에게도 생의 끝을 알렸다.
아들 보다는 주변의 뭇 남자들을 선택한 엄마에 의해 늘 캄캄한 벽장 속에 갇혀 지낸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성기능 장애와 어둠에 대해 극한의 공포를 갖고 있었던 모울. 이제 그가 가장 두려워하던 어둠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스물 아홉.... 너무나 아름다운 나이.
구원을 간절하게 바랐던 유년의 그 시절.....세상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고, 지금 그들은 다시 그들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죄를 토해 내고 있었다.
1979년 봄, 후타미 소아정신과 병동에서 한 소녀와 두 소년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그 해로부터, 17년 후 필연적으로 재회하게 된 1997년 현재.
과거와 현재의 교차방식은 연결고리를 산만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장장 1600여 페이지의 이 줄거리는 모든 사건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벽장 속 트라우마로 좁고 어두운 곳에서는 발작을 일으키는 모울(두더쥐) 쇼이치로, 엄마에 의해 온 몸이 담뱃불로 지져져 얼룩이 생긴 피부 때문에 별명이 붙여진 지라프(기린) 료헤이, 역시 정신이 불안정한 친아버지에게서 당한 성폭행과 끝내 외면해버렸던 엄마에 대한 분노를 자해로 표출하는 루핀(돌고래의 일본식 발음 도루핀의 줄인 말) 유키... 어른들의 육체적, 정신적 학대와 무관심에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입원한 세 아이들은 한 사건을 계기로 서로의 비밀스런 상처를 드러내면서 급속히 가까워진다. 친밀감 이상으로 유키를 사랑하는 소년들은 여전히 수모를 당하는 그녀를 지켜 주기 위해 모종의 계획을 세우게 되고 퇴원 기념 산행 중에 그 일을 실행에 옮긴다..
그리고 17년 후....
노인병동에서 자학에 가까운 절대적 헌신으로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유키, 유키와의 재회를 믿으며 모두에게 인정 받기 위해 앞만 바라보고 달려 온 지금, 잘 나가는 젊은 변호사로 성장한 쇼이치로와 비타협적 성향이 강한 형사 료헤이는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그녀 주변으로 모여든다. 오랜 그리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지만 과거의 기억에 대한 죄책감은 그들을 선뜻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필연적인 이끌림에 의해 재회를 하면서 그 때의 참사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시간과 함께 아이인 채로 따라 온 유년의 악몽은 세 사람을 포함한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간다.
읽는 내내 그들의 아픔은 염산이 되어 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성장한 뒤, 안정적인 환경에서조차도 제어되지 않는 그들의 트라우마는 새로운 참극을 불러 오고, 결국엔 그 비수를 자신에게로 돌릴 수밖에 없는 처절한 현실. 스물 아홉 그들에게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문득 생각나는 사건이 있었다.
1992년 충주의 김보은,김진관에 의한 의붓아버지 살인사건.
20살 까지 12년간 성폭행을 당하고 있었던 여자 친구를 구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아버지와 대면해야 하는 밤이 끔찍히도 두려웠던 그녀가 감옥 생활 중에 했던 말이 있다.
'밤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처음 알았어요' ....
욕구불만 아이인 채로 몸만 커져버린 어른들, 그 어른들이 아이를 낳아 사랑이란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과 학대는 끝없이 대물림 되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하긴 내일도...하루가 멀다면서 이어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다양한 폭력은 한 개인의 삶에서 그 고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나비효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해 보이는 '영원의 아이들'.
전해져 오는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한 3일...금요일 저녁부터 휴일까지 그 책은 나를 꽁꽁 묶어버렸다.
나날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똑 같은 상황을 예상이라도한 듯, 저자가 5년 8개월에 걸쳐 혼을 다해 엮어 세상으로 내보낸 영원의 아이는 2000년 일본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단다. 전체적인 캐스팅이 완벽했다는 것과 특히 아이들의 연기가 출중했다고 전해 들었다.
*** 일드 몇 컷 스틸.
모울의 어린 시절 역할을 맡았던 아이. 이때부터 피웠던 담배가 모울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하루 5갑씩...
어린 지라프 역.
구원 받기 위해서, 그들의 존재를 인정 받기 위해서 영산靈山에 올라 간절히 기도하는 아이들. 그 구원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오는지도 모르지만 계획한 일이 그들의 구원이기를 눈물로 소원한다.
후타미 병원에서 생활했던 1년 여...그 뒤 17년 만의 재회
서로에게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지만 유키를 사이에 두고는 선뜻 마음을 열지 못 하는 두 사람이다.
저자 : 덴도 아라타
저서 (총 19권) 1960년 5월 8일 에히메 현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대학 문학부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본명은 구리타 노리유키. 본명으로 투고한 단편 '하얀 가족'으로 1986년 야세지다이 신인 문학상을 수상, 여러 영화 각본에 참여한 후 덴도 아라타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3년 '고독의 노랫소리'로 제6회 일본 추리서스펜스 대상 우수상, 1996년 '가족 사냥'으로 제9회 야마모토 슈고로 상, 1999년 '영원의 아이'로 제53회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장편상, '애도하는 사람'으로 제140회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또한 에히메 현 출신으로 지역의 이름을 높인 사람에게 수여하는 에히메 현 문화, 스포츠 상을 받았다. 덴도 아라타는 과작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작품 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이나 배경이 되는 장소 등을 하나하나 세세한 부분까지 설정해서, 현실에 실재하는 것처럼 만든 후에야 집필 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책을 단행본으로 발표한 후 문고로 만들 때 대폭으로 개고하는 일이 많아, '가족 사냥' 같은 경우 이야기의 골격과 결말은 그대로지만 등장 인물의 설정과 성격, 도중에 발생하는 사건의 묘사까지 크게 바뀌어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외의 작품으로 '넘쳐흐르는 사랑', '시즈토 일기' 등이 있다.
'삶의 덤 > 영화, 프레임 속의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래 전의 영화 '프라하의 봄' (0) | 2012.11.04 |
---|---|
다니엘 데이 루이스 (0) | 2012.10.30 |
The Thorn Birds(가시나무새) (0) | 2012.10.14 |
통증/그들만의 아픔 (0) | 2012.10.08 |
2012년, 김기덕 감독의 황금사자 (0) | 2012.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