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나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게 되어버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어떤 꾀죄죄한 연유에서 비롯되었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그 ‘거의’에서 제쳐 둔 휑한 공터에 몇 년 전부터 정유정의 몇 작품이 들어 앉았다.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그리고 최근의 ‘28’.
인터넷으로 신청하고 기다린 날이 무려 15일.(보통은 이틀 만에 슝 날아온다.)
토요일부터 읽기 시작하면서 짬짬이 4개월 짜리 손자 봐 주고, 내 집에 머물며 곧 입주 할 집 정리 중인 딸 내외 챙겨 주고...하면서 일요일 밤 1시 조금 넘긴 시간까지 달려 끝장을 봤다.
전작들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만큼 ‘28’은 출간 즉시 베스트 셀러 7위로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서울 근교 작은 도시 화양에서의 28일간의 인수공통전염병과의 사투, 극한의 현실이 빚어내는 군상들의 이면 심리, 인간과 동물을 번갈아 화자로 갈아타면서 전개되는 다중 시점의 내면적 흐름이 기막히게 흥미로운 이번 작품 ‘28’.
어떤 상황에서도 무게를 놓지 않으면서 위트까지 잡아내는 작가의 문체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프롤로그부터 읽어들어가면 전작과는 전개가 사뭇 다른 방향에서 줄을 풀었다.
한 개인에게 각인된 트라우마를 단초로 거미줄처럼 엮여가는 관계의 필연적 갈등이 바닥을 긁으며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수업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듯 자신의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몇 층 더 깊어진 채로.
'종의 다름이 인간과 동물의 취급 차이를 정당화 할 수단이 되는가?'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들이 구제역으로 생매장 당하는 동영상을 본 날이라고 했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이튿날 까지 지상으로 울려 퍼졌다고 했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오래 귓가를 맴돌았고 '눈 뜨고 깨어나는 양심이라는 파수꾼'의 속삭임에 시놉시스를 쓰게 되었다는 ‘28’은 이러한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천벌을 받을 거야.'라는 전제를 두고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존재 또한 인간이라는 희망을 보여 준다.
소재 쪽으로 보자면 오히려 더 강한 임펙트를 내포하고 있지만, 나의 의식이 빨대에 꽂혀 쪽쪽 빨아 먹히는 것 같았던 일상 파괴적 긴장감에 있어서는 앞선 두 편이 추월한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시선이다.
굳이 덜 떨어진 이유라도 주워 꿰자면,
광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작가의 출신을 과감하게 떨쳐내지 못한 선입견도 있다.
읽는 내내 5.18이 오버랩 되는 바람에 집중력이 현저하게 바닥치고 있었던 것.
빨간 눈 괴질에 걸리지 않은 자(일반시민)와 괴질에 걸린 자(시위대)가 굵은 줄기로 내 의식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떤 사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상황들이 앞질러 가슴에 와 박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내가 만든 세계에 데려다 놓고 싶다"는 작가의 의지에서 벗어나지는 못 했다.
몰입의 어느 순간,
손자의 울음 소리에 정신없이 화장실부터 달려가 손을 씻는 나를 향해 거울 속의 여자가 멋적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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