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끝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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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숨 쉬는 너희가 좋아^^

시간을 따라서..../긴 여정, 창 밖의 풍경

일붕사-의령의 부름에 응답하다^^;;

헬로우 럭키 찬! 2013. 11. 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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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 일붕사는 세계 최대의 동굴법당이며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서기 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일붕사의 전신이라고 합니다만 현재, 고찰의 흔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내력은 끝에 올려 둡니다.

 

 일붕사 전경

 

6시 10분.

른 아침의 아스팔트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막 그친 듯 군데군데 빗물이 조금씩 고여 있는 곳도 눈에 띕니다.

손자에게 풍덩 빠져 가끔 홀가분하게 나섰던 나홀로 여행을 미뤄 둔 지 1년 여.

어제 출발하기로 한 떨 모임의 나들이 계획이 무산된 데다 마침 딸아이의 시댁 방문을 기회로 마음 먹고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이제 멀미 일으키는 빌딩 숲을 벗어 날 겁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여행에는 언제나 변수가 작용합니다.

오늘은 특히 그랬습니다.

일찍 나서서 천천히 돌아본 뒤 해거름 까지는 귀가하자 했는데.....묘사철과 단풍철이 겹쳐진 달이란 걸 완전 잊고 있었던 ....

휘파람 불며 들어 선 승강장엔 기~ㄹ게 늘어 선 객의 행렬.... 뜨아아아~안돼

이래서, 의령행 7시 첫 버스는 시간도 되기 전에 만차로 출발해 버렸고 40분이나 더 기다려서야 겨우 제일 뒷 자석 한 자리에 끼어 앉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엄청 뚠뚠한 옆 자리 아저씨의 덜 익은 술 냄새와 왠지 의도적인 부비부비에 손의 위치.....정말이지 기분 개똥(아...비유법 사용한 이래 처음으로 개똥에게 미안해졌습니다.) 같은 1시간 20분이었습니다.

분노2 부르르2

***출발 즈음엔 통로까지 꽈악 찼습니다.

 

시외버스 도착시간에 맞춰 연계되어 있었던 듯 막 출발 준비를 하는 읍내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기분이 한결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농익은 가을이 팔색의 자태로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일붕사 향하던 길에 본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과 연육사빈 형태의 빛나는 모래밭은 지나치기 아까운 절경이었지만 내려 볼 수 없어 인증샷 한 컷 못 건진 아쉬움이 컸습니다.(요때는 자가운전이 장땡입니다.)

 

* 매표소에서 내다 본 의령 시외버스 터미널 전경입니다. 의령은 합천으로 가는 버스의 경유지입니다.

 

이동 시간 35분.

드디어 일붕사가 위치한 궁류면입니다.

표지판을 읽던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우순경 사건이 섬뜩하게 다가오더라지요.헉4

당시, 내연의 처와 말다툼 끝에 만취 상태로 궁류지서에서 탈취한 수류탄 등 몇 종의 무기로 주민 56명을 살해하고 자폭하여 한동안 신문의 사회면을 톱으로 장식했던 1982년의 사건.

 

인적 없는 마을 입구 정경을 디카에 담은 후 휑하니 달렸습니다.

이 와중에 눈에 띈......어라? 요렇게 작은 마을에 양조장씩이나!  

신나2

궁류교에 서서 본 마을 뒷 산입니다. 찬바람에 보얗게 속살을 드러낸 자작나무 한 무리가 눈부십니다.  

 

* 왼쪽의 빨간 건물은 (아마도)군립 노인요양병원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노인을 위한 병원이 몇 곳이나 눈에 띄었습니다.

 

 

오늘 의령의 바람은 심술이 극에 달했습니다.

담아 가지도 못 할 애꿎은 나뭇잎만 미친듯 털어대고 억새의 허리를 사정없이 짓밟고 있었습니다. 개울은 갈 길이 막혀 주름 가득한 얼굴로 바람을 견디고 있습니다.

 

떨어진 은행잎이 와사사 와사사 지들 끼리 뭉쳐 바람길을 따라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뒷편 연두색 팬스로 둘러쳐진 곳이 마을 공설운동장이랍니다. 이 마을의 공은 본의 아니게 산으로 개울로 자주 나들이 다닐 것 같습니다.  ㅎㅎ

곳곳에 담고 싶은 풍경들이 많았습니다. 몇 장 올려 봅니다.

 

 

 

계절의 끝에서 마지막까지 안간힘으로 꽃을 피우고 있는 개망초, 구절초 등 몇 종의 들꽃이  눈에 띕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볏단 하나 남지 않은 빈 들판으로 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정지용님의  '향수'처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싯귀는 세상 어느 시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콧잔등이 시큰해 집니다. 

 

논길을 따라 걷다보면 멀리 병풍처럼 둘러 선 봉황대 아래 일붕사의 일부가 보입니다. 옆 건물은 일붕사에서 관리하는 노인요양센터로 뒷 편에 대웅전이 있습니다.

 

일러서인지 기척 없는 조용한 요양센터 주변을 불편한 걸음으로 홀로 서성대는 초로의 어르신을 뵈었습니다.  스쳐가는 그 분에게서 묵은 삶의 잔향이 연하게 베어져 나왔고 건너 온 그 느낌은 주걱이 되어 생각을 마구 휘저어 놓았습니다.

황망했던 발길을 멈추고 굳이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보았습니다..........

 

앞서, 사진으로 일별했던 봉황대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마구 찍어대기만 하는 촬영 기술이 가장 큰 문제였고, 사계 중 숲이 무성했던 여름 사진이 가장 많았던 탓입니다.)

어느 계절이든 특별한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주관입니다.

 

 

 

 

* 일붕사로 들어가 봅니다. 

 

 

* 아침 예불 시간인 것 같았습니다. 독경 중이신 스님과 받드는 불자들이 계신 관계로 대웅전인 동굴 법당은 담지 못 했습니다.

대신 퍼다 나른 ..... 

동굴 속 대웅전은 굉장히 아늑하여 오래 눌러 앉아 있고 싶은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 한 곳도 버스 시간에 쫓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음에 갑자기 짜증이 일었습니다. 

암튼, 예로써 삼배三拜(아, 이 시점에 어째 술자리 後來者가 떠오르는 건지... 오줄없는 이 순발력?을 6년 째 끌고 있는 신발 속에 구겨 넣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ㅎ)를 올린 후, 좀 전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왔던 칠성각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사진출처 http://cafe.daum.net/cs154/

사진출처 http://cafe.daum.net/cs154/

 

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모시는 사찰 전각.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우(祈雨)·장수·재물을 비는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칠성신에 대한 제사는 조정과 민간에서 계속되었으며, 이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되었다. 칠성각은 조선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해 지금도 대부분의 사찰에 두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경우이다. 칠성각에는 칠여래(七如來)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을 탱화로 그려 봉안하고 있다.(출처 : 백과사전)

 

 

일붕 서경보/1996년 83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답니다.

일붕선교종은 조계종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하며 이 분이 초대 종정이셨답니다.

 

저 윗 길 어드메쯤에서 좁은 바위 틈을 비집고 들어서면 또 한 번 펼쳐지는 절경에 감탄한다던 네티즌들의 입질도 지금 조급한 마음을 붙잡지는 못했습니다. 서둘러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압박감에 종종 걸음 치는 해를 올려다 보는 시간이 잦아졌지요.

에효, 부산에서 가까우니까 뭐.....조만간의 어느 날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눌렀습니다.

진심으로 아쉬웠던 것은 비주얼의 끝장을 보여 준 의령 쏘코키 쿡밥(또는 소바) 맛 볼 기회를 미루고 왔다는 겁니다.슬퍼2

 

 

※ 일붕사 내력

천혜의 자연 요건을 갖춘 봉황산에 소개한 일붕사는 세계 최대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으며 서기 727년 신라의 혜초스님이 창건한 성덕암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다.

이곳은 약 1330년 전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때 최고의 격전지였으며 당시 왕군이 봉황대 영역 안에 이 지역의 수많은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의 삼왕자가 계셨던 궁소 봉황대의 사찰에서 비로자나불을 안치시켜 호국 일념으로 성덕왕의 덕을 기렸고 성덕대왕이 봉황대의 산세가 빼어남과 선당의 얼이 배인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성덕사라는 귀족적 사찰을 지었으니 과히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덕사도 이조 성종25년 국령으로 불사 33개소를 회합함으로서 그 영향을 받아 승려를 학대하고 사찰을 파괴함으로서 봉황대 성덕사는 어쩔 수 없이 사찰을 궁류면 운계리 팔사곡 자사산으로 옮겨 정수암으로 그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 후 (148년전)에 장사곡 출신의 어떤 인물이 들어와 승을 축출하고 암자를 파괴할 때 쇠망치로 수없이 내려쳐도 미륵불상 한불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것을 보고 주승이 범상치 않은 일이라며 그 불상을 업고 합천군 연호사로 도망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연호사 불상 중 일부분이 성덕사 불상이라고 전해오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암자로 있다가

1934년 8월 26일 당시의 면장이 산주와 더불어 봉황대의 덕경을 도우기 위하여 벚꽃나무를 심고 관세음보살상과 여래불상을 모셨으나 소실되어 다시 이야용 스님이 법당을 짓고 성덕사라 하였다. 그러나 1984년 10월 24일 누전으로 인하여 또다시 성덕사법당이 완전 소실되었으나 1986년 7월 26일 사단법인일붕선종회 (지금의 재단법인 일붕선교종) 창종주 일붕 서경보 종정 큰스님이 혜운 주지스님을 부임케하여 이 산 이름이 봉황산이라 산의 기가 너무 세어 사찰이 부지 못하니 기를 줄이기 위해 굴을 파야 한다고 하시므로 주지스님이 불사를 이룩, 사찰명을 일붕사로 명명하여 현재는 동양 최대의 동굴법당 456.2m²(138평)과 297.5m²(90평) 규모의 동굴 무량수전이 완공되어 불자들의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 도량으로 하루 평균 2백여명의 불자들이 오고 있다.

기상이 천태만상으로 기기 절묘한 봉황대가 있는 궁류면은 의령군의 북쪽에 위치하는 면으로서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봉황산에는 이미 신라시대에 불법의 터전이 이룩되어 일찍이 신선들이 하늘에서 봉황을 타고 내려와 약수를 마셨다는 봉황대를 비롯하여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봉황암이 일명 봉두암으로 되었고 봉황단, 봉황암, 봉황루, 석문, 사무천 등의 명소가 즐비하게 있다. 일붕사는 사찰대지 16,529m²(5천평), 임야 99,174m²(3만여평), 신도수 2천여세대, 석굴 대웅전 456.2m²(138평), 석굴무량수전 297.5m²(90평), 제1요사, 제2요사, 조사전, 약사전, 북극전, 나한전, 산신각, 종각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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