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끝의 집

I’ll always remember us this way

내가 숨 쉬는 너희가 좋아^^

울타리 너머/세상 속으로

왜 유독 모차르트만 '신동'으로 불렸는지 궁금해서....

헬로우 럭키 찬! 2017. 7. 11. 19:30
728x90

♥♥♥♥ 무진장 사랑하는 모차르트 혼 협주곡....4개 중  2번 이고요.



내용 펌] http://v.media.daum.net/v/20170705093103631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 왜 유독 모차르트만 '신동'이라고 불렸을까/2017.07.05.

 

중세 암흑기에는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형태를 마귀 들린 일로 치부했다. 마녀사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관념은 어린이에게도 강력하게 적용되었는데, 이를테면 심한 병을 앓거나 식탐이 많거나 신체가 기형인 어린이는 마귀의 자식으로 치부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족 공동체는 약간이나마 책임을 모면한다. 마을 공동체에도 문제가 없고 가족도 책임이 없다. 다만 아이가 마귀에 들린 것이다. 그런 아이를 체인질링이라고 했다.

 

체인질링중에는 신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동, 그러니까 천재 중의 천재인 아이 말이다. 중세 암흑기만 해도 신동은 마귀의 자식, 즉 마귀가 착하고 예쁜 아이를 몰래 데려가고 그 대신 남겨놓고 간 괴상한 아이였다.

 

이렇게 신동은 종교적인 권능이나 위계가 설정해 놓은 경계선을 넘어서는 어린아이다. ‘정상성을 벗어난 신동의 비범한 능력은 기존의 종교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기존의 체제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우리나라의 아기장수설화와 같은 맥락이다. 신동의 몸에 들어온 마귀를 두려워하고 꺼림칙하게 여겼으며, 신동의 능력을 실험하고 검증하는 종교의식까지 있었다.

 

유럽 계몽군주들의 신동발굴

그러했던 일이 어찌하여 모차르트 시대에 와서 바뀌게 된 것일까. 4살 때 피아노를 치고 5살 때 작곡을 시작했다는 이 음악가가 비범한 아이였음에는 틀림없지만, 그 밖의 수많은 음악가들 또한 그 같은 소질을 일찌감치 보여주지 않았던가. 왜 유독 모차르트에게만 신동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일까.

 

절대왕정 시대, 곧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해 가는 격동의 시대. 이 시기에 일부 군주들은 자기들의 계급적 이해에 반하는 정책을 적극 수용하기도 했다. 이들을 계몽군주라고 부른다. 근대를 향해 진격하던 18세기 중엽, 특히 일찌감치 산업혁명과 해양무역에 뛰어든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와 달리 농촌경제에 머물러 있던 이 중부 유럽의 계몽군주들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신동을 발굴하고자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귀 들린 아이취급을 받던 신동이 계몽군주의 시대에는 새로운 교육과 문화와 예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보라, 저 총명한 아이를! 그리고 저 음악의 천재를! 모두가 저마다의 자질과 능력을 논밭에 파묻지 말고 어서 대도시로 나와서 역동적인 근대의 레일을 함께 타고 가자! 이러한 열망의 시대에 모차르트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법학과 음악학을 동시에 최고 수준으로 공부할 정도였던 시벨리우스(19세기 북유럽)나 온갖 소음과 기계음은 물론 심지어 침묵까지도 음악이라고 주장하는 존 케이지(20세기 미국)18세기 중부 유럽에서 태어났다면 신동이란 이름은 그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물론 모차르트는 신동이요 천재다. 8살 때 최초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9살 때 연탄용 소나타와 성악 모테트 <신은 우리들의 피난처>와 아리아 <가라 노여움에 싸여>를 작곡했다. 이 어린 나이에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4, 특히 그 2악장은 방금 발표된 성시경이나 이소라의 슬픈 발라드 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애틋한 감수성으로 충만해 있다. 만약 9살의 모차르트에게 도대체 사랑이 뭔지 이별이 뭔지 아무 것도 모를텐데 어찌 이런 곡을 작곡하게 된 거니?”라고 물으면 꼬마 모차르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홍시 맛이 나길래 홍시 맛이 난다고 아뢰었을 뿐 어찌 홍시 맛을 아냐고 물으신다면.”

 

계몽군주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개혁은 시민계급의 사회적 욕망과 결을 같이했다. 다만 목표가 달랐다. 왕들은 자신들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시킬 세력을 양성하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일정 단계까지는 결도 같고 방향도 같았지만, 시민계급은 군주들이 멈춘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바로 군주들의 시대를 끝장내는 것이었다. 아무리 착한 왕이라 해도 이 질풍노도’(괴테)를 막을 수는 없었다.

 

폭군 때문에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은 특정한 정치적 사건에 주목한 것이다. 그보다는 거대한 산업 지형의 변화와 이에 따른 경제 생산의 총체적 진격이 낡은 정치구조의 종막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선왕이라 해도 이 새로운 경제 생산의 드라이브를 왕정체제로 이끌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법으로 그 권한이 제약을 받는 입헌군주로 물러났고 몇몇은 판단착오를 하는 바람에 단두대에 오르거나 암살을 당했다.

 

이제 유럽의 도시들은 새로운 계급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베를린, 파리, , 런던, 라이프치히, 프라하 그 어느 곳에서나 전통의 종교적 권위나 문화 대신 새로운 문화와 교육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서서히 역사의 중앙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운명을 잇게 될 자식들을 교육시켰다. 6살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트의 손에 이끌려 고향 잘츠부르크를 출발하여 프랑크푸르트, 뮌헨, 런던, 파리, 리옹, 취리히 등 3년여의 세월 동안 시계 반대방향으로 유럽 전역을 연주하며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은 계몽군주들의 개혁과 대도시 시민들의 열망이 왕성한 교육과 결합되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감상용이 된 공개 연주회

이 정도만 해도 신동모차르트의 사회사적 의미가 확인된 것인데, 그러나 음악가 모차르트는 그저 꼬마아이였을 때 스타킹에 출연해 장기자랑을 해서 역사에 남은 사람은 아니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유럽 도시들을 전전했던 꼬마 모차르트는 자기처럼 부모의 손에 이끌려 신동의 음악을 들으러 나왔던 꼬마들과 함께 성장했다. 그들은 모두가 음악의 신동이나 천재가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낡은 세계를 때려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만한 시민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중세의 신민들은 예배나 국가 행사가 아니면 음악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18세기가 되자 시민들은 이에 불만을 느끼기 시작했고, 궁정에서는 이런 흐름에 조응하고자 시립연주협회 같은 것을 설립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1725년에 연속 공개 연주회가 열렸으며, 라이프치히에서 1763년에 열린 연주회는 1781년까지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1771)과 베를린(1790) 등지에서도 속속 이 같은 음악가협회 및 정기연주회라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제 음악은 궁정의 만찬용이 아니라 시민들의 감상용이 되었다. 음악가들은 낡고 닳은 만찬장에서 걸어나와 새 시대의 음악회장 무대에 올라섰다. 새로운 계급들은 을 내고 음악을 들으러 왔다. 왕의 생일이나 공주의 약혼식에 초청되어 저 구석자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게 아니다.

 

애써 번 을 기꺼이 지출한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음악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문화적 취향(자유롭고 활달하면서도 근대도시의 매혹적인 우울감까지 녹아 있는)을 듣고자 하였고, 자신들의 정치적 열망(왕정제 폐지와 공화주의의 힘)을 보고자 하였다.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20번 등의 곡으로 도시 시민들의 감수성을 대변하였고, 오페라 <돈 지오반니><마술피리>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나 혹은 비유적이거나 풍자적으로 왕정시대의 종막과 시민계급의 당당한 출현을 묘사했다.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호색한 돈 지오반니는 회개하라는 심판장의 강력한 권유를 뿌리치고 자신이 살아온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처참한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이로써 모차르트는 신동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미국의 어느 교육업체가 만들었다는, 그 효과를 결코 신뢰하기 어려운 <모차르트 이펙트> ‘교육 상품이 유난히 잘 팔렸던 신동 신드롬의 어느 나라는 제외하고 말이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