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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를 보다

헬로우 럭키 찬! 2012. 9. 2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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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광인의 초절정 광기 이야기(1) - 허균과 광해군 그 숙명적 만남

역사문화기행 /http://theplace2012.tistory.com/109

 

영화 왕의 남자 이후 역사의 재해석이 봇물처럼 쏟아지며 정통사극은 물론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사극과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또 한편의 영화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적 인간으로 치자면 연산군과 자웅을 가리기 힘든 이름에 조차 광자가 들어가 있는(물론 미칠 광은 아니라 빛 광이지만) 광해군의 이야기다. 영화 최종병기 활의 시대배경이 광해군 때였다면 이 영화는 광해군을 직접 모티브로 한 영화다. 최근 3대 여신 중 한명인 이민정과의 열애설로 또 한 번 곤욕 아닌 곤욕을 치루는 중인 이병헌 주연의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 그는 지존의 자리에 오르고도 결국 반정에 의해 그 자리에서 쫓겨나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폐주와 혼군이라는 오욕아래 죽었다. 선조에겐 열 두 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광해의 재능을 높이 샀지만 임진왜란이 끝나고 자신은 무시하고 왕세자인 광해를 칭찬하는 명황제의 친서를 받고 아들 광해마저 시기한다. 그리고 서자 출신으로 왕이 된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12명의 서자 아들대신 정비의 아들 13번째 영창대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아들 광해와 신경전을 벌인다.

정상적으로는 이미 차기왕의 결정권자인 선조의 눈밖에 나버렸으니 왕이 될 수 없는 남자였다. 광해는 그런데 광해는 갑작스런 선조의 승하로 인해 영창대군으로 결정되어 가던 정국을 하루아침에 뒤집고 왕위에 올라버리게 된다. 선조의 마음이 영창대군에게 쏠렸음을 알고 광해를 어떻게든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려고 많은 것들이 준비된 시기였다. 그런데 선조가 갑자기 찹쌀떡을 먹고 기가 막혀 죽어버린다. 정말 기가 막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야말로 극적으로 겨우 왕이 되었던 남자, 그래서 분조를 이끌며 사지를 떠돌던 대북파 출신 신하들과 아버지 선조의 조선보다 더 나은 조선을 꿈꾸었던 남자, 광해 그는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인기 있고 알고 싶어하는 인물 중 1위로 꼽히는 사내다.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 동인의 영수 허엽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모태 엄친아로서 오직 승승장구와 평탄이라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뛰어난 시 짓는 재주와 비상한 기억력으로 인해 우리 조선은 물론 명나라에서도 추앙하는 이가 있었던 천재 허균, 그는 정말 당대에 손꼽히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그 천재성으로 장원 급제를 하는 순간 고속 승진과 탄탄대로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는 구김살 없는 남들이 부러워 죽을 운명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웬걸 허균은 다름 아닌 광해군에 의해 대역 죄인이란 이름을 쓰고 능지처참을 당하고 효수된다. 광해군은 허균 죽은 일을 두고 죄인을 방면하고 백성들에게 잔치를 열어 허균을 잡아 죽인 일을 나라의 경사로 만들어 공표한다.

그냥 가만 있어도 따놓은 당상관으로 직행하며 정승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판서 자리는 올랐다가 죽으면 재상에 추증될 게 뻔했던 그의 인생은 어떻게 이렇게 180도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일까? 이번 기획에서는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역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허균과 광해군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허균의 삶 어디서부터 잘못되기 시작한 걸까?

석주 권필,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던 선비다. 그의 절친이 바로 교산 허균 어려서부터 두 사람은 서로 그 시재능이 비교되면서 높은 교분을 쌓았다. 그런데 그런 지기가 벼슬길에 나왔다가 당파싸움에 휩쓸려 죽임을 당한다. 허균은 그의 주검을 끌어안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노라. 선언하다. 절친한 벗 권필의 죽음 때문이었다. 서얼 출신들의 역적모의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허균은 자신이 철저히 경멸해왔던 당대 권력가 이이첨과 손잡고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정치의 길을 걷게 된다. 혹시 그럼 권필의 주검이 정말 최대 원인인가?

 

동인의 영수 집안에서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적자 허균은 어쩌다 대역죄인이 된 걸까? 허균에 내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최재성이 주인공 허균역을 맡았던 드라마 천둥소리를 보았을 때였다. 이이첨 등과 척을 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들을 돕기도 했으니 꺾이지 않는 선비정신이나 의리 때문도 아니고 당쟁에 의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드라마 천둥소리에 잠깐 비춰졌지만 내가 의미있게 본 것은 바로 누이 허난설헌과 함께 자신을 가르친 스승 손곡이달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허엽의 집의 문칸방에서 아이들 글교육을 부탁받고 허난설헌과 허균의 글선생 역할밖에 없었던 손곡이달 이첨의 서자로서 당대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3당시인이라 불리우며 그 시재는 널리 인정받았으나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운명을 절망하다 저물어간 손곡이달을 글 선생으로 두었다는 것, 난 이것이 글에 눈뜨기 앞서 세상에 눈 뜬 허균이 처음으로 접한 현실의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망나니 매부에 시집가 그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삶을 살았던 누이의 모습도 세상을 달콤하게만 보는 눈을 허균에게서 영원히 앗아버리고 오히려 냉소에 가까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말이다.

 

광해군 4년 권필이 광해군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르고 동대문 밖으로 쫓겨나 유배를 시작한 날, 권필은 울적한 마음에 백성들이 준 술을 마구 마셔댔다. 권필은 원래 정철처럼 술을 좋아했나 보다. 여하튼 그 술을 마시다 결국 절명하여 허균은 그 절명 소식에 권필의 주검을 수습하러 동대문 밖으러 갔다. 그 날의 풍경을 나의 은사께서 시 "독백"에서 이야기 시로 보여 주시어 난 1992년에 그 시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하튼 세상에 대한 낙관이나 긍정을 완전히 버리게 된 지기를 잃은 허균의 처참한 심정이 그 시의 사설엔 잘 그려져 있었다.

 

역사 교사들이 뽑은 인물분야 1위 광해군

우리 역사에서 역사스페셜에서 다루었으면 좋을 인물로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을 제치고 1위를 한 인물 광해군, 연산군과 함께 영화나 연극 등 현대 매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며 실록이 아닌 일기로서 릉이 아닌 묘로서 군주가 아닌 폐주로서 오욕을 앞으 로도 수없이 뒤집어 쓰고 있어야 할 광해군은 적자를 왕세자로 만들겠다며 버티던 아버지 선조의 마음을 잡고 임진왜란에는 조정을 나누어 이끌면서 차기 왕위가 보장되는 듯 싶었으나 늦동이 이복동생 영창대군이 적자로서 부각되며 약속받은 왕위를 위협받으며 목숨마저 위협받는 처지가 된 광해군도 허균과 마찬가지로 광기의 상징이 된다.

 

광해군의 광기의 시작은 언제일까?

선조가 몽진을 하여 의주에서 그저 명나라의 참전이나 독촉하며 아무런 대책도 수립하지 못하고 명나라로 넘어가 의탁하겠다는 헛소리나 해댈 때 풍전등화의 나라 운명을 구하러 대소신료를 이끌고 패잔병이나 탈영병, 그리고 의병들을 지도하며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의 하삼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왕조에 반감을 가진 백성들을 다독거렸던 광해군, 그 공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아버지보다 나은 왕재라며 명나라에 칭찬을 받았던 광해군은 아버지의 마음과 그 마음을 읽은 서인세력에 의해 눈앞에 있던 왕위를 빼앗길 위험은 물론 당장 잘못하면 폐서인은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의 미움을 받고 있는 상황,

실제로 선조실록에는 왕이 광해군을 미워해 왕세자를 자처하는 것도 트집을 잡고 심지어 아침 저녁으로 하는 문안인사도 받기 싫으니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소리를 했다고 기록해 전하고 있다. 선조의 찌질함이 국왕으로서는 물론 아버지로서도 드러나는 순간이라 할 것이다. 여하튼 부왕의 눈밖에 벗어났으니 훗날 사도세자처럼 소리소문없이 죽을 수도 있는 운명앞에 놓여서 제정신을 갖는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을 터.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는 광해군일기의 짧은 기록을 모티브로 삼았다.

광해군8년 2월28일조

광해군의 일기에는 이러한 글귀가 남아있다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

 

자신의 행적을 사관에 의하여 낱낱이 노출당한 왕 광해는 이러한 실록의 사초조차 신경쓰며 자신에게 불리한 어떤 기록을 숨기고 싶었다는 것 속에 영화처럼 두 명의 광해라는 상상력을 펼치며 광해군의 너무 상반되는 두 가지 이미지와 평가를 받는 왕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영화를 보기시기를 .

 

허균에게 권필이나 손곡이달이 있었고 나아가 칠서가 있었다면 광해군에겐 왕명의 출납 업무를 잠시 맡았던 허균이외에 진짜 정치적 동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강홍립 장군이다. 명나라의 요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후금을 치러 가야하는 조선군을 최대한 희생없이 고스란히 데려오라는 밀명을 내려 명을 기만하고 조정대신들인 서인세력을 기만했던 광해군. 그러나 강홍집 장군이 이끈 조선군은 전멸하고 몇몇 생존자들은 나라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생각에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자신들이 포로로 잡혔던 그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부찰들판에서 강홍립 장군은 광해군이 반드시 살려서 돌아와야 한다고 한 조선군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신도 전사하게 된다. 광해군은 임란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비록 재조지은을 진 명의 요청이었지만 그 병사를 승산없는 싸움에서 다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중용정책을 폈다. 명의 은혜를 갚는 것보다 국가의 실리를 챙겼던 광해군을 명사대에 깊숙이 빠진 당시 조정 대신들은 재조지은을 저버린 군주로서 더 이상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분조를 이끌며 사투를 벌였던 광해군은 훗날 효종처럼 당시 시대 정세와 국제 역학에 밝았고 명의 기운이 저물고 후금이 전쟁에 승리할 것을 발빠르게 간파했다. 이렇게 망쪼가 든 나라의 편을 들다 또 한번 군사를 잃고 난세에 약소국을 만드느니 어떻게든 명의 눈치를 보면서 후금과도 교섭하는 중용의 정치를 펼치고자 한 광해군, 그는 얍쌉한 기만책으로 세상을 속이려 한 인물일까? 전화의 패해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이해한 그래서 어떻게든 필요없는 국력 손실을 막고자 한 현명한 군주일까? 역사는 아직도 광해군을 직접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광해군은 군왕의 도리와 덕있는 정치를 하는 대의명분을 가진 군주로서의 자기 모습을 그렸겠지만 상황은 점점 광해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부왕의 미움과 그를 틈타 차기 왕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영창대군으로 세우려는 서인들의 세력은 강했고 광해군을 그나마 왕세자로 지키려는 동인, 대북이나 소북파는 겨우 손꼽을 정도로 가뭄에 콩난 상황, 나라의 백성과 부왕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은 초개처럼 버릴 수도 있었던 광해군은 이제 왕이 되지 못하면 죽음이랑 직결되는 엄청난 상황 앞에서 미친 척을 하거나 미쳐야만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절실한 상황에서 또 한명의 예측 못할 광인이 나타난다. 친구들과 함께 끝없이 멸시했던 권신 이이첨의 내민 손을 덥석 잡은 사람, 그리고 이이첨의 사람이 되어 자신의 반골 기질을 숨긴다. 이 상황은 드라마 천둥소리에 잘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허균이 이이첨의 손을 잡는 위악을 행하는 이유를 모르겠는 건 변함이 없다.

 

칠서지옥, 계축옥사

1613년 3월 문경의 새재[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 응서(應犀), 심전(沈銓)의 서자 우영(友英), 목사를 지낸 서익(徐益)의 서자 양갑(洋甲), 평난공신(平難功臣) 박충간(朴忠侃)의 서자 치의(致毅),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李濟臣)의 서자 경준(耕俊), 박유량(朴有良)의 서자 치인(致仁), 서얼 허홍인(許弘仁) 등이었다.

이들은 허균(許筠)·이사호(李士浩) 및 김장생(金長生)의 서제 경손(慶孫)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컬었다. 이들은 일찍이 1608년에 서얼금고(庶孼禁錮)의 폐지를 주장하며 연명으로 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이 거부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강변에서 당여(黨與)를 맺었다. 그리고는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나무꾼·소금장수·노비추쇄인(奴婢推刷人)을 가탁(假託)해 전국에 출몰, 화적질을 하였다.

그러던 중 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일을 저질렀다. 결국 이들은 피살자의 노복 춘상(春祥)이 뒤를 추적해 포도청에 고발하여 일망타진되었다.

이 때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과 그 심복 김개(金闓)·김창후(金昌後) 등이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정항(鄭沆) 등과 모의,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미고는 국문 과정에서 이들에게 거짓 자복하도록 교사하였다. 이에 박응서가 비밀소를 올려 옥사가 시작되었다.

 

허균이 희망한 이상향

허균의 꿈의 세계, 그것은 홍길동전의 율도국에 잘 나타난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백성은 백성다운 그런 공간, 그러나 땅의 도리인 인륜이나 유교적 도덕으로 하늘의 욕망과 의지인 천륜을 거스르거나 억압하지 않는 진짜 자유로운 삶이 펼쳐지는 곳, 그곳은 분명 조선은 아니었다.

허균이 보기에 막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란이 수습되는 과정에 있었던 조선은 나라가 백성에게 한 약속조차 지키지 않고 권신들은 배를 불리며 군주는 백성의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영원히 지조있는 선비는 환영받지 못하는 절망적인 사회였지, 결코 이상향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일부러 객기와 치기를 부리며 세상이 강요하는 여러가지 인륜을 거스른다. 어머님의 상이 있은 며칠 후 기생을 불러 함께 노는 등 유교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지르고 불가의 스님들과 교분을 쌓으며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불가에 귀의하겠다고 떠벌이는 등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말 그대로 이단아의 삶을 산다.

관직에서 쫓겨나면 쫓겨나는 대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을 냉소했던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과연 광해군이었을까? 광인은 광인을 알아본 걸까? 광해군은 위태위태한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이제 막 이이첨과 손잡아 패륜의 이단아임에도 죽 관직을 이어가던 허균을 도승지로 임명해 자신의 곁에 둔다. 나중엔 임금을 능멸한 죄를 묻고 그간의 온갖 공격에도 지켜주었던 광해군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이 이단아의 손을 잡는다. 영화에서 이 만남의 장면을 이렇게 허균의 말로 표현한다.

"진정한 왕이 되고 싶으십니까? 제가 진정한 군주를 만들어 드리지요."

그렇게 두 명의 광인은 서로의 욕망을 돋구고 실현시키는 데 협조한다. 물론 군신의 관계였지만 어떻게 보자면 사내 대 사내로서 자신이 가진 욕망을 발현하기 위해 세상을 깜빡 속이는 계획에 서로 협잡한 것이다.

허균은 이런 비정하고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바로 잡은 군주의 그릇으로 광해가 마땅한 그릇인지 마지막으로 한번쯤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강한 왕권을 가지고 싶었지만 자신을 반대하며 끊임없이 위협하는 서인세력을 지그시 누를 수 있는 방법을 과연 광해군은 허균에게서 찾았던 것일까?

두 사람은 서로의 욕망과 속셈을 가지고 그렇게 의기투합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는 바로 정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이 두 광기의 만남을 그 핵심적인 플롯으로 삼은 것이라 짐작된다.

 

두 광인의 초절정 광기 이야기(2)-허균과 광해군, 꿈의 좌절과 죽음

과연 허균은 모반을 위해 광해군에 접근했나?

허균은 처음 칠서의 난에 연루된 사실이 추궁돼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히 천재다운 처세를 펼치게 된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이이첨의 손을 잡아 보신하는 방법이다. 이이첨과 날을 세우지 않고 그의 수족을 자처하니 더이상 그를 잡아 죽이려는 움직임도 둔해지고 일거양득으로 권력의 정점 임금에게도 다가설 수 있게 된다.

허균은 일찍부터 칠서라 통칭되는 서자들과 사귀면서 그들과 사회 개혁에 대해 토론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천재성은 시대정신을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불만의 폭주로 보았고 그 대표적인 조선사회의 불만 세력을 서자집단으로 보았다고 하였을 때 당대에 대한 그의 직관은 정말 놀랄만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서자들의 동조자이자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특히 그는 공주 목사 시절에 이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면서 개혁을 도모하였는데 그가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후 전라도 부안의 정사암에 은둔하면서 최초의 한글소설이자 혁명소설인 홍길동전을 쓴 시기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허균은 칠서들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군자금을 얻는다는 명목으로 은장수를 살해하고 칠서를 고신하는 도중 영창대군의 이름이 흘러나오면서 서인들이 죽어나가는 계축옥사가 일어나기 전까지 교류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허균은 칠서의 난에 연루되어 있다는 고변이 있었지만 칠서의 함구로 목숨만 겨우 건진 것이다.

어쨌든 겨우 목숨만 건진 허균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 눈 안에 든 티끌처럼 여겼던 권신 이이첨과 손을 잡고 불안한 정치적 생명을 비교적 안전하게 이어갈 수 있게 된다. 대북파 이이첨의 손을 잡자 마자 예조 참의에 올라 광해군과 대북파의 수족이 된 듯 움직이면서 광해군의 신임도 얻어낸 것이다. 그는 연이어 호조참의, 승문원 부제조, 형조판서, 좌참찬에 올랐으며 천추사와 동지겸 진주부사로 임명되어 두 차례 명나라도 다녀온다. 그야말로 승진의 하이웨이였고 천재가 권신이 준 날개를 단 격이었다.

허균이 마흔 아홉 되던 1617년 겉으로는 대북파의 편에서 인목대비 폐비를 청하던 허균은 속으로는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 광해군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혁명을 도모한다. 가히 사느냐 죽느냐의 줄타기를 시작한 것이다.

허균의 친구로서 뜻을 같이하던 기자헌이 허균과 갈라서고 인목대비의 삭출을 반대하다가 유배길에 오르고 이를 허균이 외면한다. 그러자 기자헌의 아들이자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은 허균이 역모를 꾀한다는 비밀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린다.

광해군이 허균의 죽음을 국가적 잔치로 만들어 춤을 추고 놀았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 것 같다. 그렇게 신임한 허균이 자신에게 칼을 겨눈 연기였다는 게 섬찟하기도 했을 것이다. 여하튼 배반감인지 광기인지 알 수 없게 광해군은 허균을 능지처참시키고 아마도 허균의 집을 허물어 연못을 파버렸을 것이다.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맹리 양천허씨 묘지공원 내에 허균의 묘소가 있다.

 

 

 

허균은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다니다 아내의 죽음을 맞기도 했고 누구보다 전란의 폐해를 몸으로 느꼈을 법하다. 그리고 이렇게 한 나라를 전란의 위기에 놓이게 한 집권세력 서인과 무능했던 왕 선조에 대한 반감이 깊었을 법하다. 그래서 그는 정말 무능한 왕과 조정을 들어엎고 새로운 나라 율도국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으니 자기가 왕이 되어서라도 그 이상을 실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웬지 허균이 역성혁명보다 왕족 중에 한 명을 왕위에 세우고 자신은 그 왕의 정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원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양천허씨 집안의 묘에 허균의 묘소가 있다. 그가 의정부 좌참찬까지 올랐던 것이며 두 명의 부인과 함께 합장묘로 만들어져 있다. 대역죄인의 죄를 받아 죽었지만 훗날 누군가가 그를 가매장했다가 훗날 이렇게 묘를 만들어 주긴 주었나 보다. 하지만 허균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수십번 이상 등장하면서 천하의 불륜자, 이단아, 개망나니로 불리우며 계속 미움을 받는다.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대결의 장 덕수궁 석어당

 

광해군 3년(1611)에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하였다. 광해군은 1615년 4월에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시키고 1620년 경운궁의 아문(衙門)을 모두 헐어 버리고 궁명을 서궁이라 하여 격하(格下)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이 폐왕이 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이 경운궁의 별당(別堂)에서 즉위하니 그가 인조이다. 인조는 1623년 7월에 선조가 거처하던 침전만 제외하고 경운궁을 월산대군가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1904년 덕수궁 화재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다시 복구한 것이라 인목대비 당시의 건물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피난 갔던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을 때에도 사용된 전각으로 덕수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선조는 승하할때 까지 16년을 거처했고 인목대비(선조의 왕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꿇어 앉혀 죄를 물었다.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광해군은 생때같은 자식을 죽인 원수이니 불구대천지 원수라 할만하다 그러나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도 명색의 아들은 아들, 이 아들에게 석어당에서 유폐까지 당해 7년의 고단한 삶을 연명했으니 인목대비가 인조반정을 맞아 자기 뜰 앞에 무릎꿇린 광해군을 몹시도 죽이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은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훗날을 위해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는다.

 

 

광해군은 인조 15년(1637) 3월 제주시에 유배되었는데, 유배소 주위를 가시나무로 두르고 문을 봉하였으며, 집안에는 두 사람을 들여보내 일상 생활을 돌보게 하고 밖에는 군인 30명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며, 유배된 지 4년이 지난 인조 19년(1641년)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광해군이 쫓겨난 후 복위운동이 일어났었다.1628년(인조 6) 허유와 유효립이 반란을 꾀했을 때 "광해군을 일단 복위시킨 뒤 인성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고 상왕으로 추대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관련자들을 심문했던 공초내용을 보면 당시 광해군도 어쨌든 '움직였던'것은 분명해 보인다. 1627년 겨울, 유효립이 몇 차례 강화도로 사람을 보내 광해군 측근들과 연락했다는 것이다. 유효립은 광해군의 첫째 처남인 유희견의 아들이다.유효립 등이 체포되자 금부도사가 강화도로 들이닥쳤다. 광해군 주변의 나인들을 잡아가기 위해서였다. 『인조실록』에는 금부도사가 왔을 때 광해군은 문을 막아서서 통곡했다고 나온다. 체포 과정에서 나인 한사람은 칼을 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애영이라는 나인 역시 칼로 찔렀지만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이 후 광해군은 그와 아무개가 손을 잡는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먼 곳으로 옮겨 다닌다.

 

임금이 된 광해군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여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하여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억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밖으로는 실리적인 외교를 펼쳤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재건했으며,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서적 간행에도 힘써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등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

광해군은 파주 교하가 군사적으로 방어에 유용할 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해상 교역이 가능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수도를 교하로 옮길 계획을 세웠으나 계속 미루어지다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또 광해군은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을 시켜 그에 응하게 하였다가 명나라가 후금에 패하자 청나라과 화의를 맺도록 하는 등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폈다.

그러나 광해군은 끊임없이 왕권을 위협해 오던 동복형 임해군을 유배하여 죽이고,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인 후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에 유폐·후궁으로 격하하였다. 인목대비의 부친인 김제남도 죽임을 당하고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 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인 천석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그리고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이는 그동안 기가 죽어 있던 서인세력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 되었다.

게다가 무리한 토목공사로 수많은 궁궐을 중건하였는데, 전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궁궐 복원으로 인하여 자신을 욕하는 이들이 끝도 없이 생겨났다. 이로써 광해군은 그동안 자신이 임진왜란 때부터 쌓아왔던 일반 백성들의 인심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광해군의 재평가

광기에 사로잡혀 재조지은을 배반하고 명을 배신하고 후금을 지지해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놓은 죄를 받아 폐주가 되어 폐주로서 죽은 임금이 아닌 임금 광해군, 그는 어머니를 폐위하고 형제들을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린 폭군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를 그렇게만 평가해도 되는 것일까. 그의 사후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병자호란으로 인해 살상을 당하고 청에 잡혀가 몸을 더럽히고 돌아왔다 하여 환향녀란 이름으로 두번 세번 죽임을 당한 여인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친명배금 정책은 선조만큼이나 어리석은 임금으로 인조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물론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폐주였기 때문에 그 폐주의 정책을 활용할 수는 없었더라도 어떻게든 중용의 외교를 펼쳐야만 했던 것이다.

광해군의 정책을 배명의 정책으로 보는 것도 훗날의 시각이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명과 후금의 힘싸움에서 조선이 중용을 유지해 극단적으로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아 실리를 챙기는 정책은 대의명분을 챙기는 일보다 분명 비교우위에 서 있는 실리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의 바다란 칭호로 불리었던 사내 광해, 그가 꿈꾸었던 조선은 더이상 외침을 받을 필요없이 든든한 국방력을 갖추고 점차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 나가는 나라였을 것이다. 어쩌면 허균이 꿈꾸었던 세상의 모습도 광해군이 꿈꾸었던 세상과 비슷한 것은 아니었을까?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자던 허균의 유재론처럼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다시금 강성하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위에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하디 천한 사람들까지 한 마음 한 뜻으로 단결하는 사회, 저마다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자신의 위치에서 추구할 수 있게 하고 제약보다 북돋움이 많은 사회 말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꿈도 허균의 꿈도 두 사람의 파격적 광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여 스러져 버린 것이 된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허균이 광해군에게 자신의 꿈을 진정으로 걸었더라면 광해군이 허균을 대역지죄를 물어 죽이기 전에 그를 설득해 진정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역시 오랫동안 입안에 가득히 배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