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원작 : 다나베 세이코 /1984년〈월간 가도카와[1]〉를 통해 발표한 단편소설이며
가도 카와 쇼텐에서 그의 단편소설을 모아 출판한 단편집.
2003.12.13 개봉(국내 2004.10.29)
감독 : 이누도 잇신
출연 :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우에노 주리, 아라이 히로후미
그 곳이 옛날에 내가 있었던 곳이야.
깊고 깊은 바다 밑바닥....
난 그 곳에서 헤엄쳐 올라온 거야.
자기랑 이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그 곳에는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아.
너무 고요해.
그다지 외롭지는 않아.
애초부터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단지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 갈 뿐이야.
난 두 번 다시 그 곳으로는 돌아갈 수 없겠지.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미아가 된 조개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닐 거야.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언젠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니까.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어. 거기엔 또 다시 흘러버린 1년이라는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사강의 책에서 빌어 온 구절들은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사랑에 있어 시작과 끝의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사강은 사랑에 판타지를 가미하지 않는 현실적인 작가이다. 그 점에서는 일본의 멜로물과 잘 부합되고 있는 듯하고.
확실히 일본 멜로물은 극적 반전이 거의 없다.
그렇지만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을 장면들을 지루하지 않게 끌어가면서 감정의 가장 깊은 바닥을 긁어대는 애틋함을 만들어 낸다.
20살 쿠미코는 할머니가 주워 온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 <1년 뒤>에 매료되어 자신을 여주인공 이름인 ‘조제’로 소개한다. 하반신 마비인 그녀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하는 할머니 때문에 인적이 드문 새벽녘에나 유모차에 실려 바깥 구경을 하는 것이 고작인 그녀가, 우연히 마작가게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던 대학생 츠네오 앞에 유모차와 함께 쳐 박히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되고.....
장애를 가진 빈민층 여성.....조제의 칼은 모든 약자의 조건을 가진 그녀가 세상의 편견과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상징적 도구이다.
두드러지는 에피소드 없이 잔잔하게 진행되는 관계에서도 일상의 모티브는 평범 이상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는 영화였다.
소통의 방법에 서툰 그녀가 츠네오의 따뜻한 관심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간다.
사강의 조제와 영화 속 조제의 1년은 다르지 않다. 사랑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기억에서 밀려나고 엷어진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처음 자리로 돌아가 새로운 꿈을 만들 수 있다는 것.
지나간 사랑은 의외로 빠르게 현실과 동화되어 간다.
각자 조금씩의 아련한 기억을, 함께 한 1년에 담아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둔 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무서운 것을 보러 가고 싶었다는 조제를 데리고 동물원에 간다.
조제의 의식을 붙들고 있는 두려움, 곧 바깥 세상을 의미하는 무서운 호랑이를 극복해 가는 첫 걸음이다.
이제 그들의 이별은 굳이 드라마틱할 이유도 구체적일 필요도 없었다. 일상의 소소한 갈등에서 그들은 이미 공유할 수 없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도 우스울 정도로 담담하다.
곧 평소처럼 집을 나선 츠네오가 옛 여친 앞에서 마침내 오열을 터뜨린 것은 아마도 자신의 비겁함과 이제 그 집에 홀로 남아 추억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조제에 대한 애잔함일 것이다.
정체된 시간 속을 유영하는 ‘조제의 테마’....그리고 그녀는 시간을 놓아 주었다.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조제의 전동차는 삶의 진행형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러브 스토리인 동시에, 사랑이 어떻게 한 소녀를 변화시켜나가는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판타지를 만들어내지만, 그 환상은 곧 깨져버리고 현실이 어떤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현실 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을 발견하지만, 그녀가 절망을 느낄 때 그녀의 약함 뿐 아니라 그녀의 힘과 용기 또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대사가 아닌 여배우의 외양으로, 추상적인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의 힘과 용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관객들이 그것을 실제로 일어나는 일처럼 느끼기를 원했다. 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너무 많은 감정의 기복이 있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 목표는 영화가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그들이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함께 겪으면서 시작한 곳으로부터 이만큼까지 왔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종류의 느낌이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더 어울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 감상이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사랑을 묘사하는 것은 사람의 성장을 묘사하는 것이고 또 삶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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