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마을과는 승용차로 5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외부인의 왕래가 빈번해진 것이 꽤 오래 된 것 같아 보였어요.
여타의 명소 주변과 마찬가지로 코 앞에 낡은 음식점과 난장이 터를 잡고 있어 그다지 정갈한 첫 인상은 아니었죠.
들어서기 전 넓다란 주차장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본 건너편 바위의 왼쪽에 석굴이 있더군요.
석굴 앞에 서서 올려다 본 부처의 형상은 참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누가 어떤 연유로 저렇게나 높은 바위굴 속에 부처를 조각해 모셨을까.....
타의 였을까?
자의였다면.... 얼마나 간절한 염원을 품고 있었길래 저런 고행을 자처했을까?
영혼의 불멸과 사후세계를 믿었던 고대 리키아인들이 수직 절벽에 석굴무덤(아민타스 석굴무덤)을 만든 까닭은
하늘에 가까울수록 부활이 빠를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는데 그와 비슷한 사연이 깃들어 있는 걸까.......
했는데! 원효대사께서 조성 봉안하셨다는 것을 다녀 온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ㅎ
물론 거국적인 시각에서 원대한 의미의 화두를 담아 조성된 것이겠지만,
뭔가...애틋한 스토리를 엮고 있던 저의 상상은 그만 북극해로 곤두박질 쳤다는 후일담이 남아버렸어요.ㅋ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軍威 阿彌陀如來三尊 石窟)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27년 11월 20일 인근 마을의 최두환이라는 사람에 의해서라고 전해집니다. 이후 40여 년 간 방치되었다가 세상에 알려진 날이 1962년 9월 22일이었던 거죠. 그리고 곧 그 해 12월 20일에 국보 109호로 지정됩니다.
끝에 삼존석불의 가치 및 세상에 알려지기까지의 내력과 주지스님의 일화에 얽힌 내용 전문을 실어 두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아주머니 한 분이 인기척에도 아랑곳 없이 건너편의 조그마한 붓다상을 향해 기도 삼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종교는 일순위가 외형인 듯합니다.(왜 인간보다 건물에 더 집착해야만 하는지 ...나름의 변명은 있겠지요?)
그렇다면 인구에 회자될 수 있는 가우디급 건축물을 남겨 놓던가....
헌금이 쌓이면 멋 없이 살벌하기 만한 메머드급 교회 건축에 열을 올리고, 고찰로 알려진 사찰 역시 보존 보다는 증축 또는 신축에 더 관심을 가진 흔적이 보이는데... 종교지도자들도 문제지만 교세와 관련된 몇 몇 부유층 신도들의 작태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세계사의 숫한 페이지에는,
오늘날의 정통 종교라는 것이 그들이 미개종교라 배척하는 자연숭배 사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제2석굴암 주지 법등스님-자기 마음이 곧 부처요 자성이 곧 진리라
http://www.nw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32
1500여 년간 한국불교를 지켜온 군위삼존석불/2014.12.27
군위삼존불상은 경상북도 군위군 팔공산 절벽의 자연동굴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이다. 삼존석불은 제2의 석굴암으로 불리는데, 이는 경주 석굴암보다 약 1세기 정도 앞선 것으로 토함산 석굴암의 모태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들어진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은 2.18m, 왼쪽 대세지보살상은 1.8m, 오른쪽 관세음보살상은 1.92m이다.
군위삼존불상의 본존불은 사각형의 대좌(臺座) 위에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윗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얼굴은 몸에 비하여 큰 편으로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가 사라지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은 법의를 얇게 걸치고 있어서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옷자락은 넓은 무릎을 거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왼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예로써 의의가 크다.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좌우의 보살상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다. 가슴 앞에는 목걸이를 걸치고 팔에는 팔찌를 끼고 있으며, 옷은 길게 U자형의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고 있다. 이들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신체 비례와 목·허리·다리 3부분을 비틀고 있는 모습에서 새롭게 수용된 중국 당나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헌신적인 노력으로 완성한 불사
군위삼존석굴은 1550년전 아도화상께서 수도전법을 하시던 곳으로 일명 아도굴이라 하며, 그후 신라 원효대사께서 미타삼존을 조성봉안 하시고 해동제일의 석굴사원으로서 신라불교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지난 1927년 11월 20일 이 부근 마을에 살던 최두환이라는 사람이 마을 앞 돌산 꼭대기 소나무에 밧줄을 매고 절벽을 내려가 수직으로 뻗은 절벽 나무 틈에서 석굴을 발견했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제2석굴암을 헌신적인노력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불사한 법등스님
나무를 쳐내고 쌓은 낙엽을 헤치자 삼존석굴(三尊石窟)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견 된 후에도 40년 넘도록 세상에 묻혀 있다가 1962년이 돼서야 세상에 알려져 국보 109호로 지정됐다. 지금은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지만 당시는 까마득한 절벽 20미터를 오르내리는 밧줄 사다리 하나 달랑 있었다고 한다.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당시 돈 삼천만원을 시주한 돈으로 다리도 가설하고, 계단도 만들고 난관도 조성하는 등 지금의 복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1985년 까지 이곳은 황무지에 불과했다. 불사를 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국내유일의 성지로서 알려지기까지는 법등 주지스님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법등 스님이 석굴암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 경. 당시 스님은 동화사에 있었다.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동화사에서 여기까지 40 리 정도 됩니다. 석굴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느낌이 고향의 할아버지를 뵙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 어린 가슴속에 석굴암 부처님을 늘 마음의 고향처럼 간직하게 되었습니다”며 스님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1984년 스님이 동화사 초대 선원장을 지낼 때 김장 준비를 위해 5일장에 가던 중 제2석굴암 부처님께 참배를 하러 왔다. 바위산에 혹처럼 바위가 많이 붙은 것을 본 스님은 그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바위가 떨어져 사람이 다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스님은 가을이 저물어 가니 내년 봄에 수리를 해드리겠다고 절을 세 번 하며 부처님과 마음속으로 약속 했다.
“돌아가는 길에 석굴암의 스님을 만났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불사도 못하고, 주지로서 역할도 하기 힘들다며, 여기를 맡아 달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절을 맡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과 약속한날 일어난 일입니다. 이는 부처님의 계시라 생각합니다”라고 법등스님은 말했다. 법등스님의 불사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당시 채무관계가 8500만원이 있었다. 절을 맡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내가 동화사에 있으면서 여러 직책을 맡고 있어 공부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남은 기간 조용히 부처님께 귀의하겠다는 마음으로 중국과 태국 등으로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중국에서 팔만대장경인 속장경을 사왔고 일본의 신수대장경, 우리라나의 고려대장경을 준비하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절이 너무 낡아 비도 새고, 법보나 다름없는 많은 경전들이 비에 젖을까 염려 되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빌었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에서 한 신도가 찾아왔다. 그는 꿈에 부처님께서 계시하였다며 시주를 했다. 그 덕분에 법등스님은 어렵게나마 불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부분은 해결됐지만 불사는 오롯이 법등스님의 몫이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불사를 했다. 그야말로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이라 했던가? 불사의 현장에서 팔을 걷어 붙이고 삽과 괭이를 들고, 땅을 파고 터를 닦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제2석굴암이다.
신라정토신앙의 본산 제2석굴암
경주 토암산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부처님을 모셨으나, 이곳은 자연석굴 그대로를 이용했다. 경주 석굴암이 섬세하면서도 화려하여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다면, 팔공산 석굴암은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무념무상의 경지가 느껴진다. 신라의 원효대사가 태어난 곳이 지금의 경산군 자인면 유곡동이다. 원효대사 모친이 만삭이 되어 새벽에 친정을 가던 도중 큰 밤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아아 이름이 새벽이다. 원효라는 말이 새벽이라는 의미이다. 밤나무 아래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동네 이름 조차도 율곡동이라 했다.
이곳의 지명이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지금은 남산동이지만 옛 지명은 대율곡동이었다. 이곳의 산1번지에 팔공산 상상봉이 있고 그 아래, 청운대라는 높은 절벽이 있다. 이 절벽 허리 중간부분에 오도굴이 있고 이곳에서 인간 원효가 도를 닦아 개오득도 한곳이다. 인간 원효가 이곳에서 개오득도 하여 다시 성인으로 태어난 곳이라 해서 대율곡동이라 전해오는 것이다. 이곳은 신라불교의 원조였던 아도화상이 수도 전법했던 아도굴(미타삼존석불)과 신라불교의 중흥조였던 원효대사가 개오득도한 오도굴이 상존해서 전해오는 한국불교의 큰 맥을 잇는 초전법륜지다.
법등스님은 "사찰마다 특징이 있는데 이곳은 아미타불 도량입니다. 불교의 최고 이상향은 극락세계이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세분입니다. 이 세분을 미타삼존이라 합니다. 불쌍한 영혼을 극락세계로 천도하는 의식이 49제이고, 극락세계를 완성하는 의식이 미타정토신앙입니다. 신라가 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전쟁터에 나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고하게 희생되고 그런 불쌍한 영혼들을 천도하기 위해 최초로 미타정토신앙을 창출했습니다. 따라서 이곳이 신라 정토신앙의 본산인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수행중심으로 변해야 하는 한국불교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15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불교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국교로 국민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고, 국난을 겪을 땐 호국불교로 나라를 지켰다. 이렇듯 우리민족과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해 온 불교지만, 시대적 흐름을 따르지 못해 국민들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난 30여 년 간 개척불교를 해온 법등스님은 지금의 한국불교가 바람앞에 흔들리는 등불과 같고, 만경창파에 표류하는 돛단배와 같은 심정에 비유했다.
그는 “왜 이렇게 한국불교가 표류하고, 침몰해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부응하지 못하고 원리전도몽상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심이시불이오 자성이시법’이라 했던가? 그래서 견성을 하게 되면 자기 자성만 확천대오하면 반드시 성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리가 자기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 가운데 있다. 따라서 회광반조하여 여실지견하면 날마다 날마다 마음 빛 돌이켜 여질이 이와 같이 바로 알아서 수처작주하여 입처개진이라. 가는곳마다 가는곳마다 내 삶의 참된 주인공으로 새로운 삶을 창조해 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정신으로 합일 되고 이런 인연으로 다져서 만고불변의 거룩한 부처님의 불생불멸의 정신을 구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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