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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교향곡 제45번 F#단조 '고별'

헬로우 럭키 찬! 2012. 8. 1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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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만 1악장 도입부에서 순간적으로 대중가요를 떠올렸다는.....


대중가요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난리 나겠지만 ㅎ


부제副題의 영향이 컸으리라는 생각이다.^^

이놈의 뇌는 먼저 인식한 것에 우선적인 표현권을 부여하는 것 아닌가 싶다.   

암튼, 슬픈 제목의 반전에 놀람교향곡 보다 더 놀랍고^^, 재미나는 발상이었던......... 

 

 

 

 

바이올린만 남은 마지막 악장에 숨은 배려/김종규(울산시립 부지휘자)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의 <교향곡 제45번 ‘고별’>은 평범한 4악장이지만 마지막 악장은 좀 특별하게 돼 있다.

 

곡이 연주되는 도중인데도 불구하고 단원들은 악보를 접고 보면대에 켜놓은 촛불을 끄고 한명씩 퇴장한다. 마지막에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어두침침한 촛불아래에서 하이든과 바이올린 주자 한사람만이 외롭게 남아서 지친 듯이 곡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바로 휴가가 필요했던 단원들을 위해 마련한 하이든의 재치가 담긴 작품이었던 것이다.

 

당시 하이든이 29세인 1732년 부터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家)에서 악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대단한 음악애호가였던 에스테르하지후작은 궁정악단을 위해서라면 비용을 아끼지 않았고 하이든의 창작활동도 일체 간섭하지 않았지만 음악을 너무나 좋아했던 에스테르하지후작은 당시 프랑스의 베르사이유궁전을 흉내 내어 화려한 성을 하나 지었는데 여름휴가를 궁정오케스트라와 함께 이곳에서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성의 방이 충분치 않아 단원들의 가족은 함께 데려갈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이 성에 있는 동안은 단원들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하이든은 이곳에서 많은 곡을 작곡해 발표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벌여 에스테르하지 후작과 하이든의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었지만, 단원들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1772년 여름, 다른 해보다 2달이나 더 연장된 휴가에 단원들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플루트 주자 ‘프란츠 닉스트’라는 사람은 새를 잡으려고 후작의 지붕에 올라갔다가 실수로 집을 모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났으며, 첼로주자와 플루트 주자는 한 술집에서의 싸움으로 플루트 주자의 한쪽 눈이 실명한 사건이 있었다.

 

이 외에도 단원들 간의 싸움이 많아지자 결국 하이든은 단원들의 편치 않은 감정을 이해했지만 영주가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시대였으니 하이든으로서도 후작에게 어떻게 해달라는 등의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꾀를 내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교향곡 제45번 ‘고별’>이었던 것이다.

 

하이든과 악단 단원들을 아꼈던 고용주 에스테르하지후작은 고별의 초연만 보고도 곡에 담긴 단원들의 열망을 곧 알아차리고 다음 날부터 장기 휴가를 주었다고 한다. 하이든은 이처럼 악단의 문제점들을 능숙하게 처리해 단원들로부터 ‘파파(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