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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사/집은 주인을 닮나보다

헬로우 럭키 찬! 2014. 10. 1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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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명산의 고찰古刹이었음에도 오늘이 첫 행보입니다개인적으로 고찰이 주는 의미를 역사적 관점에서 찾는 편이다보니 오늘날 집회소 외관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대다수 한국 종교지도자들의 전시 취향 건축물을 마주봐야 하는 불편함도 변명이 될 것 같습니다.

금관의 예수, 금칠한 부처, 끝없이 올라가는 첨탑, 찍어낸 듯 화려하기만한 단청...사람은 없고 탐욕스런 수단가들과 바벨탑만 존재하는 것이 작금의 종교적 현실이 되었습니다.

종교는 인간 존엄성의 모독이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일을 하는 착한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착한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

미국의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로 79년 노벨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거 박사의 말입니다.

섬뜩하더군요. 다시 말해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의지로 사고할 수 없게 만든다는 거죠.

자아를 잃지 않도록 혜안을 키워야 진정한 종교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옛날 길 없는 길, 태고의 많은 선사들의 일화와 풍진 세상으로부터 마음 둘 곳 찾아 일심으로 오르내렸을 민초들의 눈물이 얼룩진 곳, 지금은 비구니의 일념을 담아 세인들의 안식처로 자리매김한 석남사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오늘 첫 발 내딛었습니다.

 

 

 

 

 

 

 

누군가의 기원이 쌓인 돌탑들이군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망이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나들이객이 몰리기엔 조금 이른 시간...미처 달아나지 못 한 푸른색의 엷은 안개가 가지 사이로 서성입니다.

 

 

 

오랜 기원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의 수난으로 인해 파괴되어 개축 또는 증축된 건축물입니다. 고찰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목이 잘려 나간 고목의 눈물이 베고니아를 키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개울 거너편...눈길이 가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묘하게 끌리는 색이던데 무슨 나무인지....

 

 

이렇게나 물이 맑을 수 있다니....사진은 언감생심 따라잡을 수도 없습니다.

 

 

철문에 메달린 푯말....'수행 중이시라 출입이 허락되지 않더라지요.

 

돌계단을 오르니 쥔장을 닮은 듯,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사찰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石南寺는......

* 가람 배치도

 

그 외 가람들..

 

소 개

석남사는 불자들에게는 국내외 가장 큰 규모의 비구니 종립특별선원(宗立特別禪院)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울산사람들에게는 늘 열려있는 휴식처로서 늘 푸르른 산림과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제공하며 한겨울에는 가지산의 설경과 어울려 가람을 하얗게 덮은 눈은 우리들에게 절경을 보여줍니다.

위 치

석남사(石南寺)는 가지산(迦智山)동쪽 기슭, 울산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위치한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입니다.

고헌산맥은 저 멀리 강원도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뻗으면서 줄달음질을 치다가 도중에 경상북도 청도의 운문산을 형성한 뒤 다시 뻗으면서 형성되는데, 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천황산, 영취산 등의 영산 명봉들을 이루어 놓고 있습니다.

가지산에는 석남사, 신불산에는 간월사, 영취산에는 통도사 등의 신라 명찰이 들어 앉게 되었으니 불심과 영통한 법운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 칭

석남사(石南寺)란 이름은 가지산(迦智山)을 석면산(石眼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의 남쪽에 있다해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가 람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강선당(講禪堂) · 조사전(祖師殿) · 심검당(尋劍堂) 30여 동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건물로 1791(정조 15)에 세운 극락전이 있으며 다음 가는 건축물로는 순조 3년에 세운 대웅전입니다.

이 외에도 문화재로 도의국사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인 삼층석탑, 조선 초기의 엄나무구유 · 돌구유 등이 있습니다.

 

창 건

헌덕왕(신라제41憲德王 서기809-826)에 한국에 최초로 선을 도입한 도의국사 (道義國師)가 일찌기 영산 명지를 찾다가 이 곳 가지산의 법운지를 발견하고 터를 정한 뒤, 신라의 호국을 염원기도하기 위해 창건하셨습니다.

도의국사는 신라 제 37대 선덕왕 1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지장의 제자가 되어 그 불법을 물려 받고 법호를 도의라고 개명한 뒤 821년에 신라로 금의환향하여 최초로 선문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남종선의 시조가 되었으나 고국에서는 아직 그의 혁신 이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들어가 제자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다가 3년 만에 석남사를 창건하고 가지산파의 개조가 되었습니다.

 

중건중수

창건이후 여러 차례 중건중수(重建重修)를 거듭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그 후 1674(현종 15) 언양현감 강옹(姜甕)의 시주로 탁영(卓靈), 자운(慈雲), 의철(義哲), 태주 (泰珠)가 중창하였고, 진혜(振慧). 쌍원(雙遠). 익의(益儀). 성진(性眞)이 단청하였으며, 동시에 종과 북 등의 불구(佛具)를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정우(淨佑). 각일(覺日). 석맹(碩孟) 등이 극락전. 청풍당. 청운당. 청화당. 향각(香閣)을 증축 하였고, 희철(熙哲)선사가 명부전을 세웠습니다. 1803(순조 3)에 침허(枕虛), 수일(守一)선사 등에 의하여 중수되었습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황폐해졌다가 1912년 우운(友雲)스님에 의하여 다시 중수된 바 있으나 한국전란으로 폐허가 되어 그나마 남아있던 신라 고찰의 모습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현 재

이렇게 폐허가 된 것을 1957년 비구니(比丘尼) 인홍 (仁弘)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먼저 대웅전, 극락전, 그 밖의 부속시설을 중수중창을 하고 다음에 종각, 침계루, 심검당 등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크게 각 당우를 일신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며, 이때부터 비구니들의 수도처로서 많은 비구니들의 정진하는 곳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824년에 도의가 호국의 염원아래 15층으로 세운 것이라 하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방치되어오다가 1973년 스리랑카의 승려가 사리 1과를 봉안하면서 3층으로 개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