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사 대적광전, 보물 833호
신문왕이 다녀갔다는 기림사는 달(月)을 품은(含) 함월산 바로 아래에 있다. 함월산은 달을 먹고 토함산은 달(月)을 뱉는다(吐)는 뜻이니, 두 산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는 사실은 그 이름만 보고도 알 수 있다.
동해 바닷가에서 멀찍이 대왕암을 본 뒤 감은사 터를 들렀다가 경주 시내로 향한다. 머잖아 길이 갈라지고, 대종천 물줄기도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으로 가면 추령을 넘어 경주 시내로 가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기림사에 닿는다.
▲기림사 대적광전의 삼존불. 보물 958호
기림(祇林)은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후 20년 이상 머물렀던 기원정사의 숲이다. '기림사는 천축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창건'하였다는 절 입구 안내판의 자부심을 보면 신문왕이 천하의 보물 만파식적을 얻은 후 다른 곳 아닌 이곳에 들른 까닭이 짐작되는 듯도 하다. 안내판은 그후 643년(선덕여왕 12)에 원효대사가 사찰을 크게 키우면서 절 이름을 기림사로 바꾸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림사의 본래 이름은 임정사(林井寺)였다. 기림사 홈페이지는 '창건 설화'에서 광유성인이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절 이름이 임정사였다고 전한다. 기림사는 창건 150년 후에 원효대사가 기원정사에 착안하여 붙인 새 이름이라는 것이다.
▲기림사 소장 보물 415호 건칠보살좌상
한편, '임정사'라는 이름은 기림사의 유명한 우물들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대적광전 옆 석탑 옆의 장군수, 천왕문 안쪽의 오탁수, 천왕문 밖 절 입구의 명안수, 후원의 화정수, 북암의 감로수… 모두들 이름난 우물들이다.
장군수, 일제가 독립군 탄생 두려워 막아버려
마시면 장군이 된다는 장군수는 독립군의 탄생을 두려워한 일제가 막아버렸다. 너무 맛이 좋아 까마귀(烏)까지 쪼아(啄) 먹었다는 오탁수, 마음이 편안해지는(華) 화정수, 눈(眼)이 맑아지는(明) 명안수, 하늘이 내린 이슬(露)같이 단(甘) 감로수… 홈페이지는 지금도 감로수와 화정수는 떠 마실 수 있다고 안내한다.
기림사에는 뛰어난 문화재들도 많다. 기림사의 본전인 대적광전(보물 833호), 대적광전의 삼존불(보물 958호), 옻칠을 한 희귀한 종이부처 건칠보살좌상(보물 415호), 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유형문화재 214호), 대적광전 뜰의 삼층석탑(유형문화재 205호), 약사전(문화재자료 252호), 비로자나불 복장전적(보물 959호) 외에도 문화재자료 6점 등을 보유하고 있는 성보박물관, 삼천불전, 김시습 사당, 그리고 대적광전 오른쪽에 버티고 서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500년 수령의 보리수나무….
▲골굴암
선무도 배우러 매년 3천여 명 외국인이 찾는 골굴암
기림사를 크게 키운 스님이 원효대사라고 했다. 그러므로 원효는 기림사 근처인 골굴사에도 머물렀을 개연성이 높다. 골굴사(骨窟寺)는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의 왼쪽 골짜기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전한다. 원효가 골굴사에 머물렀다는 증거로 볼 만한 대목이다. 혈사는 곧 굴(穴)로 된 절(寺)이다. 혈사에 원효가 머물렀고, 원효가 죽자 아들 설총이 아버지를 기려 골굴사에 와서 살았다는 해석이다.
골굴사 홈페이지는 골굴사 역시 기림사를 창건한 광유성인 일행이 세웠다고 전한다. 그들이 인도의 사찰 건축 양식을 본떠 천혜의 석굴사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골굴암은 거대한 석회암 바위 꼭대기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석굴 벽면에 마애불상(보물 581호)을 새겨 사찰의 주불로 삼았고, 주변의 12개의 석굴을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했다.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의 원경(왼쪽)과 근경
석굴 속 마애불상을 거느린 천연 석굴사원으로 이름 높은 골굴사는 불교 무술인 선무도(禪武道)의 본도장으로도 유명하다. 일요일을 제외한 날에는 매일 오전과 오후에 '선무도와 문화예술'이라는 이름의 공연도 펼쳐진다.
골굴사는 또 전국 모든 사찰들 중에서도 템플스테이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유명 사찰이다. 선무도와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기 위해 외국인만도 연간 3000여 명이 골굴사를 찾는다. 겸재 정선이 < 골굴석굴도 > 를 남긴 골굴사,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산 304번지에 있다.
▲장항사터의 3층석탑. 국보 236호
'국보' 석탑, 깊은 산중에 숨어 있네
골굴사에서 돌아 나와 4번 도로로 다시 진입한다. 감은사와 추령으로 가는 삼거리는 금방이다. 다시 감은사로 갈 수는 없으므로 당연히 우회전을 한다. 금세 화랑고등학교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닿는다.
직진하면 추령고개를 넘어 경주 보문관광단지로 간다. 하지만 그 길로 곧장 넘어버리면 경주에서 두 번 다시 가보기 어려운 문화유산을 놓치게 된다. 국보 236호인 '경주 장항리 서 5층석탑'이 바로 그것이다.
이름이 특이하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분류별 문화재'를 찾아보면 보통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이나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식인데 이곳은 '경주 장항리 서 5층석탑'이다. 소재지를 설명하는 '경주'만 같고 그 뒤의 표기 방식은 아주 다르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은 경주에 있는 불국사에 가면 다보탑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경주의 감은사 터에 가면 동서 두 개의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불국'사' 다보탑과 감은'사지' 동서석탑은 전자는 사찰 건물이 있고 후자는 그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에서(건물은 없고 절터만 있다는 뜻에서)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경주 장항리 서 5층석탑'은 또 무엇인가? 경주에 있는 (절이나 절터가 아닌) 장항리라는 마을에 가면 (본래 동서 두 탑이 있었지만 동탑은 없어지고 지금은) 서쪽에 있던 것만 남은 3층석탑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본래 그곳에 있던 절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이런 명칭이 생겼다.
▲장항사터 석탑의 몸돌에 조각되어 있는 도깨비 모양의 문고리가 눈길을 끈다.
통일신라 이후 우리나라의 사찰은 보통 금당을 절터 가운데에 놓고, 그 좌우로 탑을 배치한다. 감은사 이전에는 금당 앞 가운데에 탑 하나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탑은 둘이지만 금당 좌우가 아니라 한쪽에 두 탑이 몰아서 세워져 있다. 절터가 좁아서 그랬던 것 같다.
도로쪽의 동탑은 몸돌을 모두 잃고 지붕돌만 차곡차곡 쌓여 있다. 서탑은 그와 반대다. 1층 몸돌에 빼어난 인왕상 조각을 거느린 서탑은 당당히 국보의 영예를 누리고 있는 걸작이다. 안내판은 '1층 몸돌 4면에 도깨비 형태의 쇠고리가 장식된 두 짝씩의 문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는 연꽃 모양 좌대 위에 서 있는 (사찰이나 불상 등을 지키는 수호신인) 인왕상을 정교하게 새기어 희귀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조각 수법으로 보아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법당과 쌍탑 위치가 특이했던 장항사
이 탑은 깊은 산속에 있는 까닭에 화랑고등학교에서 출발해도 1시간 30분 이상을 걸어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넓은 도로가 닦여서 10분이면 닿는다. 그나마 도로변에 있어서 신비감도 잃었다.
도로가 나지 않았더라면 더 아름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장항리 서 5층탑', 쌩쌩 달릴 수 있도록 길까지 개설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도 있지만, 역시 신작로(新作路)는 도시에나 낼 일이지 이렇게 맑은 산에는 개설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듯하다.
▲도로에서 계곡 너머로 바라본 장항사터 석탑
오마이뉴스/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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