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 없이 번성하는 '아마조네스' 물고기 / 2018.09.23. 한겨레
암컷끼리 살다 다른 종 수컷의 도움으로 단성생식
아마존 몰리·붕어..정자의 자극만 받고 유전자는 파괴
← 화살을 쏘기 쉽도록 한쪽 가슴을 도려낸 아마존 부족의 모습을 새긴 조각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그리스 신화에 아마존(복수 아마조네스)이라는 여성으로만 이뤄진 부족이 나온다. 전쟁을 좋아하는 이들은 여자 아기의 오른쪽 가슴을 도려내 활쏘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했다. 종족 유지를 위해 이웃 부족과 아이를 잉태하는 의식을 치렀지만 여자아이만 길렀다. 이런 신화의 배경에는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억압과 차별을 벗어나고픈 욕망이 깔렸을 것이다.
실제로 ‘아마존 페미니스트’들은 원더우먼 같은 신체적으로 강한 여성을 통해 성평등을 이룩하려 했다. 그러나 급진 페미니스트조차도 여성만의 세상을 꿈꾸지는 못했다. 넘을 수 없어 보이는 생물학적 장벽, 그것을 넘은 물고기가 있다.
멕시코 북동부와 미국 텍사스 주 남쪽으로 흐르는 따뜻한 강물에는 송사리처럼 생긴 작은 물고기가 산다. 먹이가 풍부하고 여건만 맞으면 불과 몇 달 만에 성체가 돼 매달 새끼를 60~100마리 낳는 왕성한 번식력을 보인다. 놀랍게도 이 물고기는 모두 암컷이다.
영어 이름은 ‘아마존 몰리’로 그리스 신화의 여성 전사 부족에서 따왔다. 이 물고기가 척추동물 가운데 처음으로 무성생식으로 번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건 1932년이었다.
암컷만으로 이뤄진 아마존 몰리는 번식을 할 때 그리스 신화의 아마존처럼 이웃 부족의 힘을 빌린다. 유전적으로 가깝지만 다른 종 물고기 수컷을 유인해 짝짓기한다. 암컷의 난자가 발생을 시작하려면 정자의 자극이 필요하다. 정자는 난자를 뚫고 들어와 발생을 촉발하지만 수컷의 디엔에이(DNA)는 일절 난자와 결합하지 못한다. 난자에 들어온 수컷의 정자는 모두 파괴된다. 결과적으로 이 물고기 암컷은 수컷의 도움을 받을 뿐 자신의 유전자만으로 후손을 만든다.
세균이 둘로 갈라지거나 은행나무 밑동에서 싹이 나오듯이 미생물이나 식물 가운데는 암컷과 수컷 없이 어미 그대로를 복제하는 무성생식이 널리 알려졌지만, 척추동물에서 이런 방식의 생식이 가능하다는 건 충격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밝혀지는 데는 분자유전학이라는 도구가 필요했다.
마침내 아마존 몰리의 비밀을 밝히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웨슬리 워런 미국 워싱턴 대 유전학자 등 국제 연구진은 ‘네이처’ 자매지인 과학저널 ‘생태학 및 진화’ 2월11일치에 실린 논문에서 암컷만으로 번성하는 아마존 몰리의 비밀을 분자 차원에서 밝혔다. 척추동물에서 암컷만으로 번식하는 단성생식(처녀생식)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다.
얼핏 단성생식은 유리한 번식방법으로 보이기도 한다. 짝짓기를 둘러싼 암컷과 수컷 또는 동성끼리의 경쟁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절차다. 이 과정에서 종종 목숨을 잃기도 한다. 만일 어미가 아주 훌륭한 유전자를 타고났다면 그 자질을 고스란히 자손에게 물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성생식이다. 어미의 유전자가 복제를 통해 고스란히 자손에서 발현하기 때문이다. 유성생식을 한다면 어미의 유전자는 절반씩 자식에게 유전된다. 어떤 형질이 전달되는가는 전적으로 우연이어서 최악의 조합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암컷과 수컷이 절차가 번잡하고 결과도 불확실한 섹스를 통해 유성생식을 하는 것일까. 진화생물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생물의 유전자는 분열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데, 이들은 대부분 생물체에 해롭다. 유성생식을 하면 양쪽의 염색체가 결합해 감수분열을 하는 과정에서 이런 잘못된 유전자는 쉽게 제거된다. 그러나 무성생식에서는 원본을 계속 복사하기 때문에 중간에 생긴 오류가 쌓여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섹스의 또 다른 장점은 다양성을 낳는다는 것이다. 암수 양쪽에서 최선의 결합을 이루지는 못해도 다양한 결합을 통해 유전 다양성을 높인다. 다양성이 중요한 건 환경이 변화하거나 새로운 종류의 기생생물이나 질병이 닥쳤을 때이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다양성을 갖췄느냐가 멸종이냐 번성이냐를 가른다. 이를테면 키 작고 수확량이 풍부한 형질의 벼는 홍수가 자주 드는 기후로 환경이 바뀌었을 때 도태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아마존 몰리는 어떻게 몰락을 피할 수 있었을까.
연구자들은 아마존 몰리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종이어서 진화의 저주가 아직 쌓이지 않은 상태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유전체(게놈)를 분석해 보니 반대였다. 이 물고기는 출현한 이후 10만년이나 진화를 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한 세대가 3~4달이니 무려 50만 세대가 지난 셈이다. 일반적인 무성생식이라면 이미 멸종했을 기간이다.
그런데 아마존 몰리의 게놈에선 나쁜 돌연변이가 축적돼 퇴화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 물고기는 단일한 복제물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복제집단이 있었다. 서로 다른 복제집단 사이의 다양성이 이 물고기의 진화를 지탱하고 있었다. 특히 면역체계를 담당하는 유전자의 다양성이 높았다. 말하자면 아마존 몰리의 유전형질은 매우 뛰어나면서 강건하다는 것이다. 그 비결은 뭘까.
연구자들은 아마존 몰리가 애초 서로 다른 두 종의 물고기가 종간 장벽을 넘어 잡종을 형성해 탄생했다는 데 주목했다. 이런 종간 잡종은 종종 두 어미 종보다 크고, 더 화려하며, 튼튼한 형질이 나타나는 ‘잡종 강세’를 보인다. 암말과 수탕나귀의 교배로 태어난 노새는 힘이 세고 튼튼하다. 그러나 노새가 번식능력이 없는 것과 달리 아마존 몰리는 번식을 하는 법을 터득했다.
게다가 아마존 몰리의 탄생은 기적적인 행운의 결과였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가 두 종의 교배를 통해 인공적으로 아마존 몰리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현재의 아마존 몰리는 유성생식을 하지 않고도 그 부작용을 피할 수 있는 절묘한 유전형질을 갖춘 매우 드문 잡종이다.
복제 기법을 통해 암컷 중심으로 번성하는 척추동물이 아마존 몰리만은 아니다. 그동안 무성생식을 하는 척추동물은 어류, 양서류, 파충류에서 모두 50여 종이 발견됐고, 또 일생 중에 적어도 일시적으로 복제 방식으로 번식하는 종도 50여 종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친근하고 흔한 물고기인 붕어도 그런 식의 번식을 하는 물고기이다. 낚시 대상으로 가장 널리 사랑받고 식용 대상으로도 중요하지만 붕어의 번식 행동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온 뒤 새로 생긴 웅덩이에서 붕어를 발견하곤 한다. “하늘에서 떨어졌나?” 의심할 만하지만 사실은 개울에 살던 붕어가 빗물이 만든 물길을 따라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온 것이다. 붕어가 가장 흔한 민물고기의 하나가 된 데는 이런 진취적인 행동이 뒷받침됐다.
그러나 이런 모험에는 대가가 따른다. 새로운 웅덩이에 암수가 짝 맞춰 진출할 확률은 높지 않다. 기껏 새로운 서식지를 확보했지만 짝짓기 상대가 없는 외톨이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럴 때 붕어가 구사하는 전략이 바로 아마존 몰리가 하는 복제 번식이다. 암컷 붕어는 가깝지만 다른 종인 잉어 등의 수컷 정자의 도움을 받아 발생해 자신의 복제 붕어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붕어는 아마존 몰리와 달리 게놈의 크기를 3~4배 늘린 다배체 복제를 한다.
김동수 부경대 양식학과 교수 등 연구자들은 ‘한국어류학회지’ 2002년 제6호에 실린 논문에서 논산, 주문진, 속초, 삼례 등에서 채집한 붕어의 80% 이상이 염색체 수가 정상보다 3배인 3배체 개체라는 사실을 밝혔다. 경남 함안에서 채집한 붕어는 95%가 3배체였다.
우리나라 하천에 사는 붕어의 대부분은 사실 ‘복제 붕어’인 셈이다. 낚시하는 사람이라면 특정 저수지나 하천에는 크기나 모양, 색깔이 거의 판박이인 붕어가 잡힌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게다가 복제 붕어는 모두 암컷이다. 암컷이 다른 종 수컷의 도움을 받아 번식하니 만들어 내는 복제 후손이 모두 암컷인 것은 당연하다. 물론 붕어에도 수컷은 있다. 태어날 때 붕어는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암수가 비슷하고 수컷 쪽이 좀 더 많다. 그러나 다 자란 붕어를 채집해 보면 수컷은 10%가 안 된다. 그 이유는 붕어가 양성생식이 아닌 복제를 통한 단성생식을 하기 때문이다.
붕어는 이런 기발한 번식방법뿐 아니라 다른 기발한 생존 전략도 보유한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나 연못 바닥에서 붕어는 4~5달 동안 겨울잠을 자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남는다. 얼음과 눈으로 덮인 저수지 바닥은 햇빛이 투과하지 못해 무산소 상태다. 붕어는 간에 저장한 글리코겐을 분해해 생존을 위해 에너지를 얻는데, 그때 분해 산물로 젖산 대신 알코올이 생성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젖산에 의한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이때 붕어의 혈중알코올농도는 100㎖당 50㎎(0.05%에 해당)이 넘는데, 사람이라면 면허정지 처분을 받는 수준이다. 붕어는 무산소 상태에서 술 빚는 효모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효소를 만들어 생존한다(▶관련 기사: 한겨울 연못 밑 붕어는 술에 기대어 생존한다).
외래종 포식자인 큰입배스에 대한 붕어의 대응책도 눈길을 끈다. 장민호 공주대 생물교육과 교수팀이 우리나라 호수와 저수지를 조사한 결과 배스가 사는 곳의 붕어는 그렇지 않은 곳에 비해 어릴 때 빨리 자라는 생장 전략을 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배스가 있는 곳의 붕어는 길이보다 몸의 부피를 늘리는 쪽으로 성장했다. 배스의 목구멍에 쉽게 넘어가지 않도록 몸의 형태를 바꾼 영리한 전략이다. 수많은 어려운 환경 변화에도 붕어가 우리 주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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