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시간으로 8월 19일 12시 30분, LA 롱비치에 위치한 빈센트 토마스 다리에서 토니 스콧 감독이 투신자살 했습니다. 향년 68세.
알려진 자살 원인은 치유 불가능한 악성 뇌종양 때문이라더군요.
어차피 수술은 불가능 한 것, 잃어 갈 기억들을 붙들며 구차하게 삶을 늘이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놀랐다기보다 또 하나의 멋진 세상을 잃었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습니다. 대중들은 형 리들리 스콧에 가려져 그의 작품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 했다고 하지만 내가 접했던 10여 편의 작품은 몰입도에 있어 씽크로율 90퍼 이상었다는...
그의 사망 소식에 우리나라 많은 영화팬들이 각자의 마음을 담아낸 글로 인터넷을 급 달구고 있습니다. 올라 온 글 중 다음은 토니 감독과 작품에 대해 공감되는 부분이 아주 많아 멋대로 스틸! 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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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스콧, 그를 기억하게 하는 다섯 편의 영화
[토니 스콧 Tony Scott(1944~2012)]
나름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영화' 혹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을 꼽으라면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 많은 영화와 그 많은 감독 중에 어떻게 그렇게 쏙쏙 뽑아내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5명을 뽑으라면, 저는 언제든 토니 스콧을 꼽아 왔습니다. (늘 '토니 스코트'라고 쓰다가 갑자기 '토니 스콧'이라고 쓰려니 좀 그것도 그렇습니다)
토니 스콧은 한동안 돈 들인 블록버스터 부문에서 '가장 돈이 아깝지 않은 장면을 뽑아 내는 감독'으로 꼽혀왔습니다. 한때 '불꽃같은 젊음'을 가장 강렬하게 그려냈던 스코트는 나이들면서 약간의 혼란을 겪는 듯 했지만 그래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감독들 중 하나로 꼽혀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치의 뇌종양이었다니.
그가 어디서 태어나 누구의 영향을 받아 최고의 감독이 되었는지 같은 위인전 풍의 내용은 사실 잘 모릅니다. 형인 리들리 스콧과 함께 영국에서 광고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수백편의 광고를 찍었고, 이 과정에서 특유의 영상미를 완성시켰다는 정도.
특이한 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시나리오에 크레딧을 올린 경우는 거의 없더라는 것입니다. 24편의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프로듀서로 나선 경우는 그 두 배가 넘지만 시나리오를 직접 쓴 건 딱 두 번 뿐. 그것도 정식 상업영화 데뷔 전의 소품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 개연성이 지적됐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네. 제가 '말이 안 되는 영화'에 유난히 좀 민감한 편입니다. 그런 제가 봐도 스코트의 작품에 사용된 시나리오들은 탄탄한 플롯을 자랑합니다. 오히려 내로라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출신 감독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런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꼽은 그의 대표작 5선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 문상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라스트 보이스카웃'이나 '폭풍의 질주 Days of Thunder' 팬들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5. 맨 온 파이어 (2004)
한국 영화 '아저씨'에 깊은 영향을 미친 영화들 중 하나인 '맨 온 파이어'는 토니 스콧이 본격적으로 덴젤 워싱턴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잡은 작품으로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크림슨 타이드'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 이후 스콧의 영화 5편 중 4편의 주인공이 워싱턴이라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스콧이 복수를 소재로 선택한 것은 비교적 초기작인 '리벤지' 이후 오랜만의 일입니다. 게다가 그 대상이 다코타 패닝이라는 건 관객의 공감을 200% 올려놓을 수 있는 배치죠. 마지막 시퀀스에는 약간의 아쉬움도 남지만, 음악과 함께 휘발유 냄새가 나는 영상은 수작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이후, 덴젤 워싱턴이 사실상 고정 주인공처럼 되면서 전작들의 경쾌한 스텝이 사라지게 됐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토니 스콧 자신이 그걸 원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4.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 (1998)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테크노 스릴러는 기존의 토니 스콧 영화와 사뭇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전의 액션들이 좀 더 우직하고 선이 굵은 느낌이었다면,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는 초시계로 시간을 재듯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 신과 신이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영화입니다.
이미 고참 감독의 길에 접어든 스콧이 이 영화를 만든 데 대한 개인적인 소감은 주다스 프리스트가 '페인 킬러' 앨범을 내놨을 때의 느낌이랄까요. 놀랍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작품 이후 스콧과 윌 스미스가 한번쯤 더 작품을 함께 했더라면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최근작들이 훨씬 더 생기 넘치는 영화가 되었을텐데..
아울러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은 전혀 비중 없는 도청 기술자 역으로 등장한 잭 블랙. '화성 침공' 등에 얼굴을 비치긴 했지만 이때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도 뒷날의 얘기일 뿐. 만약 요즘 이 영화를 처음 보는 분들은 전혀 웃기지 않는 잭 블랙을 보는 것도 이색적인 느낌일 겁니다. 나름 '선악의 판단이 없이 하는 일만 하는 공대생'의 느낌을 주는 캐릭터였는데 말이죠.
3. 크림슨 타이드 (1995)
지금까지도 '잠수함 영화'를 한 편만 뽑으라면 뭐니뭐니 해도 '특전 U보트(Das Boot)'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편을 뽑으라면 아무래도 나머지 한 편은 '크림슨 타이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좁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남자와 남자의 격돌, 그리고 거기서 뿜어 나오는 팽팽한 긴장은 이 영화를 '남자들의 영화'로 만드는 데 충분했습니다. 진 해크만과 덴젤 워싱턴의 충돌은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은 배우들이 꼭 참고해야 할 연기(마이클 만의 '히트' 따위나 봐선 절대 연기가 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남성용 영화'의 거장이지만 스콧이 자주 쓰는 캐릭터에는 '의리'라는 요소가 매우 희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스콧의 영화에서 남자들 사이의 우정이란 서로 걱정하고 이해해 주는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대결하고, 상대의 가치나 실력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죠. '탑 건'이나 '스파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 요소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바로 '크림슨 타이드'입니다.
또 이 영화를 잊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으로 한스 짐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 가끔은 그게 그거라서 구별하기 힘들다는 혹평도 있지만, 이 시한폭탄 같은 긴장감을 주는 한스 짐머의 스코어는 '크림슨 타이드'의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비고 모텐슨과 설경구가 은근 겹쳐집니다. 물론 무명이었던 두 사람과 잠수함 내부 환경, 그리고 해군 제복의 느낌일 뿐. 캐릭터가 비슷한 건 아닙니다.
2. 탑 건 (1986)
IMDB에서 이 영화의 평점이 6.7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니 대체 왜? 뭐가 부족해서? 하긴 영어 사용자들이 이 영화를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들 수도 있겠죠. 특히 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발 킬머의 "You can be my wingman"은 영화 사상 가장 느끼하고 유치한 대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청춘들은 이 영화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습니다. 불과 1500만 달러를 들여 만든 영화가 전 세계에서 3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습니다. 1986년의 세계 최대 흥행작인 것은 물론이고, 투입 대비 수익률로 따지면 역대 최상위의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신의 무명 배우 톰 크루즈'는 고른 치열이 빛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단번에 전 세계를 사로잡아 버렸고, 이후 4반세기를 꿰뚫는 스타의 화려한 탄생을 알립니다. 켈리 멕길리스가 조금 더 미인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지만 뭐 다 바랄 수는 없죠.
창공을 쪼개는 영상미, 26년 뒤 한국에서 만들어진 어떤 영화의 플롯까지 지배하는 완벽한 전형의 제시, 톰 크루즈-발 킬머-멕 라이언까지 보석 같은 신인들을 골라낼 수 있었던 제작진의 선구안까지(그게 스콧 혼자의 힘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전설이 될 만한 작품입니다.
(물론 톰 크루즈의 저 뒤쪽에 팀 로빈스가 큰 키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는 것도..)
특히 해롤드 폴터마이어, 조지오 모로더, 케니 로긴스, 스티브 스티븐스, 칩 트릭, 마이애미 사운드머신, 벌린(베를린^^), 그리고 여기에 제리 리 루이스와 라이처스 브라더스까지 얹힌 사운드트랙은 80년대 영화 중 무엇에 비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플래시댄스'나 '세인트 엘모스 파이어' 정도?
1. 트루 로맨스(1993)
사실 '탑 건'을 제치고 꼽을 영화가 있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비록 이 영화의 흥행 성적이 '탑 건'에 미치지 못하는게 사실이라 해도 이만큼 액션과 로맨스, 판타지와 코미디가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진정한 아드레날린의 미학이라고나 할까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퀜틴 타란티노를 오늘날의 거장으로 만드는 데에는 이 영화, '트루 로맨스'가 한 몫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글로 쓰고 고전 영화에서 보던 것이 실제 영상으로 가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공부가 되었을테니 말입니다. 비록 그가 이 시나리오를 헐값에 팔았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결말이 그가 직접 쓴 것과 상당히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올리버 스톤이 만든 '내추럴 본 킬러스'보다는 이 작품에 훨씬 더 만족했다고 전해집니다.
(인터넷에서 '트루 로맨스'의 대본을 검색하면 타란티노의 원본과 실제 영화에 사용된 대본의 두 가지가 검색됩니다. 결말을 제외하면 대동소이하지만, 그래도 장면 장면에서 타란티노 풍의 장황한 대사가 많이 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본은 본래 '내추럴 본 킬러스'와 한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가 전성기였던 크리스천 슬레이터와 파트리샤 아퀘트의 연기도 그만이지만 막 스타 악역의 길을 밟기 시작한 게리 올드만, 딱 두 장면에 정신 빠진 모습으로 나오는 브래드 피트를 비롯해 조연들의 '오션스11'을 보는 듯한 화려한 연기 경연이 영화의 매력을 배가시킵니다.
흔히 우리가 '낭만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달 밝은 가을 밤에 하우스 밴드가 멋진 테라스에서 쿨 앤 더 갱의 'Cherish'를 연주하는 광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의 'romantic'이란 말의 의미에서는 '질풍노도'의 요소가 생략되어선 안됩니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격정이야말로 로맨티시즘의 이상인 것이죠. 이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들은 중세 기사들의 무용담입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격정과 과장, 허세를 영화 '트루 로맨스' 만큼 잘 표현한 작품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크림슨 타이드'의 그 '한스 짐머'가 이런 달콤한 멜로디를 내놨다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입니다. 에밀리아넨코 효도르가 그린 병아리 그림이랄까요.
이 영화를 보다가 생각나는 옛 이야기 하나. 알라바마(파트리샤 아퀘트)가 클레어런스(크리스천 슬레이터)에게 자신이 창녀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대사는 분명히 "I've been a call girl for exactly four days, and you're my third customer" 였는데 자막은 "당신이 내 첫 손님이었다구요"라고 뜨더군요. 1993년만 해도 수입사 관계자들은 주인공이 '창녀와 결혼한다'는 데 대한 도덕적인 근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보다 훨씬 전 얘기긴 하지만 '졸업'을 극장에서 볼 때는 더스틴 호프만의 연애 상대인 앤 밴크로포트가 자막상으로는 캐서린 로스의 엄마가 아니라 이모로 표현되기도 했더랬습니다. 어찌나 도덕적인지...)
원제처럼 그야말로 '천둥의 나날'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왼쪽부터 토니 스콧, 돈 심슨(제작자), 로버트 타운(시나리오 작가), 제리 브룩하이머(제작자), 그리고 톰 크루즈. 스콧-심슨-브룩하이머가 구축했던 황금의 트리오에서도 이제 브룩하이머만 남았군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도 분홍색 모자를 쓰고 이 음악에 맞춰 주먹을 흔들고 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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